어느 보살님의 修行에서 울어난 信心과 共感의글.
강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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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종교
어제는 종일 가을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쾌청한 하늘에 소슬바람과 함께 단풍이 무르익고 석류가 익어가는 전형적인 가을날씨다. 봄은 새싹을 움트게 하고 대지에 활력을 주지만 가을은 소슬바람과 함께 어딘지 모르게 무언가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게 하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사색의 계절인 것 같다.
읽지 않은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두 아이와 한번만이라도....” 시한부 아빠의 특별한 외출이라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조선일보 10월 17일)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암 환자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어린 남매를 놀이동산에 한번 못 데리고 간 것이 가장 아쉽다”고 병동의 간호팀장 수녀님께 간곡한 부탁을 하여 수녀님의 주선으로 에버랜드에 가서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보내는 장면이 소개 되었다. 세 살, 두 살배기 아이들은 어려서 아빠가 아픈지도 모르고 있었고 아내는 별거 중이라 동행하지 않았다.
환자용 이동식 침대에 누워서 아이들이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이들을 향해 안간힘을 다해서 손을 흔드는 장면의 사진을 보니 가슴이 찡하다.
신문의 그 옆면에는 대선주자 세 분의 동정이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려 있다.
별도의 경전이나 어느 큰스님의 설법보다도, 나에게는 오늘 가을이 주는 계절의 정서와 함께 이 신문의 장면들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다시 보며 깊은 공부가 되고 있다.
‘한 사람은 생의 마지막 문턱에서 두고 떠나야할 어린 자식들과 마지막 정을 나누고 있고, 또 다른 세 사람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다.’
이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다.
알고 보면 말기암 환자만 시한부 인생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시한부 인생들이다.
지금 열심히 뛰고 있는 대선후보들도 몇 십 년 후면 이 세상에 없을 사람들이다.
존재의 유한성과 인간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와서 어떻게 살다가 무엇을 남기고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야 잘 살고 가는 것일까?
죽음은 혼자 떠나는 여행이다.
아무리 집착해도 형상적인 것은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고 오직 평생을 자기가 지어 놓은 무형의 업만 가지고 혼자 떠나는 긴 여행길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 작가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란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그는 평소에 사냥과 낚시로 살생을 즐겼던 사람이다. 그래서 인지 말년에 자신의 엽총으로 자살을 한다.
이승의 삶을 마감하는 죽음의 모습도 각자의 업에 따라 너무도 다양하다.
생전의 삶의 모습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도 서로 다른 것이다.
현세를 힘들고 고달프게 살았던 사람들은 비교적 편안하게 간다고 한다.
집착이 덜한 사람이 죽음을 잘 수용하는 것 같다.
생과 사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소멸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고 있지만 영혼은 육신과 함께 금방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애벌레가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나비라고 하듯이 육신이란 낡은 옷을 벗고 영혼은 다음 생을 찾아 훨훨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마지막 관문을 잘 통과하려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야 한다.
그러므로 이승의 삶을 마치고 돌아갈 때 마지막으로 입고 가는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귀중한 무엇을 줘도 잡지 못하고 손을 펴는 것이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갈수 없고 다만 생시에 지어놓은 업만 가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는 생에 대한 집착과 물질의 소유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이승에서 맺은 인연에 대한 집착으로 죽음이란 마지막 관문을 가볍게 통과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고 고통스러운 이별의 순간을 겪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수행하는 목적은 성불이지만 수행의 정도에 따라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형태가 결정된다고 보면 된다.
최후의 이별은 자기가 이승에서 평생 동안 같이 했던 자기 육신과의 이별인 것이다.
평생을 입고 관리해 오던 육신이란 낡은 헌옷을 벗어 놓는 죽음이란 마지막 통과의례를 잘 치러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 마지막 관문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무거운 삶의 무게 때문에 의지할 곳을 물색하다가 종교라는 것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화를 만들고 신을 창조해 내고 그 신에 의지하는 기막힌 방편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신들이 인류 역사상 수없이 많고 우리 인간과 함께 살아온 것이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신들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무거운 삶의 무게와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어딘가 의지하고 위안을 얻고자 해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
원초적인 불안을 신앙을 통해 의지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가장 정확히 보고 확실한 대안을 마련해 놓은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인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부처님의 가르침도 각자의 업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이 천차만별이다.
신심 있는 불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도 기복 일변도로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의식과 형식에 길들여져서 외통수가 되고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오늘은 예고한 대로 종교에 대해서 공부해 보기로 한다.
나는 생사의 기로에서 실존적 의문으로 고뇌하다가 부처님을 만나서 회생의 길을 안내받고 그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러주고 전하기 위해 자청해서 반야용선이라는 금강카페의 아름다운 도반님들을 위해 간식당번이 되어 영혼의 간식을 차려 올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의 간식 메뉴는 종교라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 간식은 우리만 먹을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같이 해야 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9월11일 리비아 주재 미국대사와 외교관 세 명이 이슬람 무장 세력의 공격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마침 그날이 9월11일이다보니 9.11사건 11주년을 기해 기획된 테러라는 말도 있지만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 한 편이 원인이라는 말도 있다.
‘무슬림의 순진함’이란 정체불명의 영화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비하하며 동성애자나 아동성애자로 묘사했고 이 영화를 추천한 사람이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을 불태우겠다고 했던 미국의 테리존스 목사라는 소문 때문이다.
이것을 계기로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과 동남아의 몇몇 이슬람국가들이 반미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류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종교가 대립과 투쟁의 불씨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국가 간의 대립은 물론이고 우리의 일상에서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관계가 불편하고 심지어 부부, 형제, 부모 자식 간에도 종교로 인한 갈등과 불화가 있는 것이다.
종교가 개인은 물론 국가나 민족 사이에 분쟁이나 전쟁의 불씨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같은 민족이었지만 종교가 달라지면서 서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인간사의 갈등과 세상의 분쟁을 종교가 해결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종교 때문에 분쟁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가 종교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자기가 믿는 하나의 신만 주장하는 유일신사상 때문이다.
인류의 상당수가 신의 이름으로 서로를 미워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일신 사상의 대표적인 종교가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인 것이다. 이들 유일신교는 오랜 세월동안 증오와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유일신 사상의 성서들은 신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한 완벽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편의에 의해 인위적으로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
같은 성서를 읽고도 그들이 받아들이는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개신교도들은 불교사찰의 불상과 천주교의 마리아상을 보고 우상숭배라고도 한다.
어느 교회의 성도들은 사회의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봉사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절의 마당에 있는 불상의 이마에 붉은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리는가 하면 제주도 원명선원의 경우는 작은 불상 750기의 목을 자르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초등학교에 세워져 있는 단군상의 목을 자르기도 하고 다른 종교의 기물을 파괴하기도 하고 심지어 방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슬람교도가 꾸란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환자를 보살피고 있을 때 똑 같은 꾸란을 읽은 다른 이슬람교도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몸속에 폭약을 숨기고 인간폭탄이 되기도 하고 알 카에다 에 합류하여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성직자들의 모습도 제각각이다.
같은 천주교의 신부이면서 아프리카에서 헌신하며 복음을 전하다 목숨을 바친 이태석신부님이 있는가하면 제주도 강정마을에 가서 국가안보를 위해 건설해야하는 해군기지의 반대를 주장하며 데모를 하는 신부님도 있다.
지율스님께서는 천성산의 도룡뇽을 살려야 한다고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하며 터널공사를 지연시켜서 엄청난 국고를 낭비하기도 했다.
불교의 핵심은 어느 한곳에 치우치는 극단이 아니고 중도인 데도 많은 불자들이 중도의 지혜를 체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도 역시 서로 다른 업력인 것 같다.
각자의 업에 따라 성직자들의 모습도 너무나 대조적이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각자의 업에 따라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다가 이승을 마감할 때도 같은 종교를 믿으면서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죽음이란 긴 영혼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각자의 업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환생의 인연을 만나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돌아오는 시기 역시 일정하지 않다.
환생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기약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계의 모습도 육신만 없을 뿐, 이승의 연속이므로 영적인 기운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기운의 원천이 바로 본인의 공부와 수행으로 얻고 닦은 지성과 영성으로 무명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는 깨달음인 것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구약이라는 경전은 고난을 겪고 있던 유대인의 결속을 위해 엄한 율법으로 그들을 통제하기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율법을 위반하는 자는 저주와 보복을 받도록 되어있다.
만인에게 공평하고 자비로워야할 신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고 보복하는 신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유태민족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결속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위기에 처해 있었고 무언가 의지하고 기다리지 않으면 현실의 고통스런 삶을 견뎌내기가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강한 율법으로 묶어놓고는 그들을 구원해줄 메시아가 온다고 하며 기다리게 하고 결속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집트의 노예생활과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구박과 천대 속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한 유대교에 의지하여 그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엄한 율법에 묶여 이해와 용서라는 것을 모르고 끝없는 보복과 복수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사랑과 용서’를 주장하는 훌륭한 성인 예수님을 만났으나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니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당시의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로마의 비라도 총독에게 이스라엘민족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고 고발하여 십자가에서 처형을 하게 만든 것이다.
‘사랑과 용서’라는 새로운 사상을 펼치고 있던 예수님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고 결국은 처형을 한다.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율법에 묶여서 끝없는 보복과 복수를 하고 있던 유태인들에게 ‘사랑과 용서’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단이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상은 불교수행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생각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약속이란 신약성경은 불교의 법화경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종교학자들에게는 상식이 되어 있는 실정이다.
예수님은 불교수행을 했고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불교수행을 했다는 흔적이 실증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처형되지 않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사상을 수용하고 받아들였다면 유태인과 이스라엘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태인들이 겪은 고충은 말로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헌신하던 성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처형하게 한 그들의 업보인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유태인들이 타민족보다 우수한 면이 있는 것은 그들의 생활지침서인 ‘탈무드’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5천년 동안 다른 민족의 박해를 받으면서 유랑생활을 견뎌낸 힘은 바로 ‘탈무드’란 정신적 지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마지막 구절은 저주와 보복이지만, 탈무드에는 전혀 그런 말이 없다.
탈무드는 유태교의 랍비(선생)들에 의해 집대성되었고 그들에 의해 전승된 훌륭한 유대인의 성전(聖典)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혜로운 삶을 위한 교훈들로 가득한 것이 탈무드라는 것이다. 구약성서는 훗날 기독교의 경전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그 이후의 구전율법(口傳律法
그들이 신만 믿고 가만히 있었는데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것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교도들이 자기들의 고향인 중동지역에 국가를 세우려는 치밀한 계획으로 오래 동안 건국 작업을 추진했던 것이다.
재력이 있는 유대교도들은 자금을 지원하고 인맥이 닫는 사람들은 강대국의 권력자들의 용단을 얻어내기 위해 각계각층에 로비를 했던 것이다. 마침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의 공포가 알려진 후라서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유대교도들의 건국계획에 동조하게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선진 강대국들의 권력자들이 국가 하나를 만드는 것은 새롭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 국가의 지도자들이 설득과 힘의 과시로 국경을 다시 그린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협력과 건국을 열망하는 유대교도들과 여러 나라의 협조로 이루어진 것 이다.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고 평화가 온 것은 아니다.
이 지역에는 여전히 자기들이 믿는 신만 주장하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 그리고 이슬람교도 사이엔 평화가 없이 갈등과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 종교는 각자 자기들이 믿는 신만을 주장하며 피로 얼룩진 역사와 현재도 그 신의 이름으로 계속 갈등과 분쟁의 연속이다.
그러나 불교는 타 종교와 다른 것이, 각자의 삶을 통한 인생의 고뇌를 신에게 의지하거나 어떻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스스로 깨닫고 실천해 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공부이며 자신에 관한 공부다.
그렇다고 불교가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공부를 통해 진정한 신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누구나 수행을 통해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신과 인간의 뿌리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성에 내재한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공부를 기본으로 수행을 하다보면 생노병사는 모든 생명체의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 과정을 통해 삼라만상의 실상을 깨닫고 무명에서 깨어나 영혼의 성숙과 함께 윤회고를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불교는 수많은 신이 등장하는 다신이며 누구나 수행의 정도에 따라 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특정한 신이 아니고 모두가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행의 여부에 따라서 누구나 부처님처럼 깨닫게 될 수 있다고 하며 더불어 같이 공생공존 해야 한다고 전하고 있다.
불경에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에는 많은 신들이 동참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아미타불에 관한 설법을 할 때는 우리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조상인 제석천의 환인께서도 동참하여 여러 부처님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부처님의 법회현장에는 삼세제불을 비롯한 여러 보살들과 제자들은 물론 많은 신들과 대중들이 참석하고 있다.
이처럼 아미타경 법회중증분에는 “사리불을 비롯하여 제불보살님들과 함께 석제환인 등 하늘의 많은 대중들도 함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제환인은 우리민족의 시조인 단군과 환웅의 조상인 것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지기 몇 천 년 전에 개국신화와 함께 전해진 ‘천부경’이 있다.
‘천부경’은 ‘삼일신고’ ‘참전계경’과 함께 우리 민족의 3대 경전 중 하나이며 그 중에 최상의 경전이다.
통일신라 때에 고구려 땅인 백두산에서 발견된 비석에 기록된 고문자를 해석하지 못해 아무도 그 뜻을 모르고 있었는데 신라의 대학자인 최치원이 그것을 보고 한자로 번역하여 81자의 경문으로 후대에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해석문이 없고 원문만 전해지다 보니 해석을 놓고 다양한 의견이 많이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이경숙님의 해석이 가장 완벽하고 옳은 해석인 것 같다.
이경숙 불자님은 천부경 해석뿐만 아니라 불경과 함께 동양의 고전은 물론 현대과학을 비롯하여 박학다식(博學多識)한 분이다.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천부경은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이란 우리민족 최초의 고유 신앙이 소개된 것이다.
첫 구절과 끝 구절을 소개해 보면 이렇다.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
천부경 전문을 보면, 一 은 하늘을 묘사했고, 二는 땅을, 三은 사람을 묘사 했다. 다시 말해서 一二三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란 天地人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은 ‘하늘은 시작됨이 없이 시작된 하늘이다.’ 그리고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은 ‘하늘은 끝남이 없이 끝난 하늘이다.’ 이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無始無終의 불교의 우주관과 같은 것이고 반야심경의 不生不滅과 같은 표현인 것이다.
ㅡ積十鉅, 無櫃化三(일적십거 무궤화삼)은 “하늘이 열겹으로 쌓인 것이 담을 그릇(상자)이 없어서 사람으로 화한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하늘의 정기가 함축되어 쌓이고 쌓여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전문(全文)의 뜻을 요약하면, “삼라만상의 근원인 하늘이라고 하는 우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하늘과 땅과 사람이 형태는 달라도 근본은 같은 것이며 사람은 하늘의 정기가 함축되어 탄생한 것이므로 사람이 중요하다”는 인간의 존엄을 알리는 인본주의 사상이다. 서양의 사상이 신과 인간을 대립관계와 종속관계로 본 신본주의 라면 천부경은 사람 속에 하늘의 기운이 있다는 인본주의인 것이다.
좀 더 쉽게 풀이하면, “하늘과 땅과 사람의 근원은 하나이고, 하늘은 그 기운의 바탕이고 땅은 그 기운을 받아서 만물이 생성소멸하는 터전이고 사람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가장 으뜸이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있어도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천지인은 셋인 동시에 하나인 것이라고 했다.”
좀 더 비약하면, “무시무종과 광대무변의 허공에서 인연에 따라 삼라만상이 생멸하는 불교의 논리와 상통하며 그 중에 사람이 가장 하늘의 정기를 많이 받고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늘의 기운이 농축된 것이므로 존중해야 한다는 인본주의 철학이 담겨있다.”
불교보다 몇 천 년 앞선 우리 민족의 고유 신앙인 天地人의 삼신(三神)신앙과 불교의 삼신불(三身佛)이 근원적으로 상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은 천지인(天地人)의 하늘(天)과 같고, 원만보신노사나불은, 지(地)인 땅과 같고, 천백억화신인 석가모니불은, 인(人)이라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민족의 고유 신앙인 삼신사상이 인도로 전해져서 불교사상의 기원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최상의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상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삼국유사를 기록한 일연스님께서는 아미타경에서 하늘의 임금인 제석천의 환인을 개국신화에 접목시켰던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종교학자들의 몫인 것 같다.
그러나 불교공부를 하면서 깜작 놀라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금타 큰스님과 청화 큰스님의 위대하신 가르침이다.
보리방편문을 통하여 “空,性,相, 一如의 一合相으로 통관하면서 三身一佛인달하여 阿彌陀佛을 상념하고, 內外生滅相인 無數衆生의 無常諸行을 心隨萬境轉인달하여 彌陀의 一大行相으로 思惟觀察 하라”는 것이다.
空,性,相,은 바꾸어 말하면 天,地,人,이다.
참으로 훌륭한 가르침이다.
공부를 해보면 삼신의 부처님과 천지인이 상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열심히 수행을 하다보면 여러 부처님들의 가호와 부처님의 법을 수호하고 있는 호법신장님들의 위신력을 알게 된다.
지난번 봉정암 적멸보궁에서의 기도를 할 때 설악산의 빼어난 풍광과 지기가 뭉친 단단한 반석위에 단아한 사리탑의 모양이 마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아미타경을 설하시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 도반님들은 자정이 넘은 심야에 봉정암의 사리탑 앞에서 일심으로 합장하며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던 것이다. 그때 사리탑이 푸른 섬광과 함께 사방으로 움직이는 참으로 신비한 불보살님의 위신력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우리 도반님들의 지극한 신심이 봉정암 사리탑의 부처님의 기운과 합일되는 현상이었다고 여겨진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먼 옛날 과거생 어느 때에 우리민족으로 태어나서 여기서 수행하시다가 가신 것 같고 봉정암사리탑에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며 남기신 사리가 봉안되어 있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부처님의 기운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다만 그 기운과 합일할 수 있는 우리들의 견고하고 청정한 신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정법에 의존하여 신심을 가지고 열심히 수행하면 누구나 부처님의 가피를 입게 되는 것이다.
나처럼 몇 회에 걸친 암수술을 하다가 어느 날 이것이 의사에게만 의존할 것이 아니고 아상과 집착으로 인한 나의 업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마음을 비우고 부처님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일상의 수행을 통해 병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예수님처럼 훌륭한 수행자가 손바닥에 못이 박히고 십자가란 형틀에 메달아 놓았다고 금방 죽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죽지 않고 다시 40일 동안 추종자들에게 진리를 전파하다가 당시의 유태인들은 율법이란 철통같은 굴레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디론가 몸을 감추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가 된 것이라고 본다.
예수님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그분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용서’라는 부처님과 같은 자비사상은 훌륭한 교훈으로 민중의 가슴에 전파되고 있었다.
가난한 이웃을 자기 몸처럼 돌보고 고통 받는 병자와 약자들을 사랑으로 보살폈던 것이다.
한편, 제국주의 로마가 주변의 많은 국가를 통치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이 타민족들의 각기 다른 신앙이었다.
특히 보이지 않게 늘어나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로마황제는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로마제국이 통치의 방편으로 도입한 것이 기독교인 것이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고충을 겪다가 전환점을 맞은 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약280-337년)인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원래 태양신을 숭배하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를 공인하고 자신도 기독교신자가 된다.
그 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목적은 유일신하느님과 로마에서 신으로 숭배하던 황제를 결합시켜 로마황제를 기독교의 최고 지도자로 만들고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를 선택한 것이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받아들여 다른 종족이나 나라의 신앙을 하나로 묶으려고 했으나 예상치 않은 난관에 봉착한다.
예수님의 정체를 놓고 성직자들의 시비가 엇갈리게 된 것이다. 예수가 사람인가 신인가를 따지며 천상에서 예수의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 지위를 알 수 없다고 다투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과 자비’로서 내 몸과 같이 보살피는 데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 시비로 논쟁을 거듭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기독교인들이 교리의 해석을 놓고 서로를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관계정립을 놓고 성직자들의 분열로 싸움이 끊이질 않자,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논쟁 끝에 “성부, 성자, 성신은 하나인 삼위일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오직 한 분뿐이며, 예수는 그의 독생자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이시다!”
라는 교리의 성립과 확정으로 가톨릭교회가 탄생하지만, 1054년 정권과 교권의 대립으로 서로마제국의 기독교는 로마가톨릭으로, 동로마제국의 기독교는 동방정교로 분리되고 동유럽을 비롯해 러시아 정교 등으로 전파되어 갔다.
동과 서로 갈라진 가톨릭교회는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를 주장했지만, 그들은 주도권을 놓고 분쟁을 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십자군전쟁과 종교재판을 비롯한 엄청난 죄악을 범하고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패로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파는 경우까지 등장하자 1517년에는 마르틴루트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영국 왕 헨리8세는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져서 이혼을 하려고 했으나 로마가톨릭에서 허용하지 않자 성공회라는 영국교회를 새로 만들기도 하고 가톨릭과 영국교회, 개신교인 청교도 세력이 뒤엉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저지르기도 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개신교도 수많은 종파가 생겨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가톨릭 본산이라고 주장하는 로마교황청은 내부적인 응집력을 우선으로 효율적인 조직관리와 교단의 운영으로 신성불가침의 굳건한 위상을 정립하며 교세를 확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를 알기 쉽게 요약한 것이다.
앞으로 불자들의 소양과 종교에 대한 기본공부를 위해 기독교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요약해 보았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와의 충돌과 갈등은 9백년을 이어오고 있다. 다음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슬람과의 관계와 불화에 대해서도 올려 볼 생각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불교수행을 통해 부처님과 같은 자비로 끝없는 사랑과 용서를 주장하셨다.
알고 보면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과 자비’로서 같은 것이고 기독교인과 불교인은 같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동문이고 형제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서로가 반목하는 어리석음의 발단은 공부와 수행이 부족한 일부 성직자들의 편중된 시각으로 진정한 부처님과 예수님의 뜻을 모르는 크나큰 과오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과 불자들은 사랑과 자비로서 가슴을 활짝 열고 서로가 형제인 것을 확인하고 서로 협력하여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길 바란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2012. 10. 23. 상락화 2012-10-31 12:21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가톨릭 본산이라고 주장하는 로마교황청은 내부적인 응집력을 우선으로 효율적인 조직관리와 교단의 운영으로 신성불가침의 굳건한 위상을 정립하며 교세를 확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를 알기 쉽게 요약한 것이다.
앞으로 불자들의 소양과 종교에 대한 기본공부를 위해 기독교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요약해 보았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와의 충돌과 갈등은 9백년을 이어오고 있다. 다음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슬람과의 관계와 불화에 대해서도 올려 볼 생각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불교수행을 통해 부처님과 같은 자비로 끝없는 사랑과 용서를 주장하셨다.
알고 보면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과 자비’로서 같은 것이고 기독교인과 불교인은 같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동문이고 형제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서로가 반목하는 어리석음의 발단은 공부와 수행이 부족한 일부 성직자들의 편중된 시각으로 진정한 부처님과 예수님의 뜻을 모르는 크나큰 과오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과 불자들은 사랑과 자비로서 가슴을 활짝 열고 서로가 형제인 것을 확인하고 서로 협력하여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길 바란다. 2012-11-04 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