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과 宗敎-상락화 보살제2탄.
강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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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종교(2)
종교를 바로 알아야 종교로 인한 불화를 해소하고 지혜로운 삶을 통해 사바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종교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만큼 너무도 예민한 분야이다 보니 종교에 대해서 언급하기가 쉽지 않다.
자칫하면 자기가 믿는 종교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오해와 함께 구업을 짓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신중하고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금강카페라는 훌륭한 배움터에서 마저 ‘판도라의 상자’라고 열지 않는다면 우리는 외눈박이가 되고 말 것 같아서 용기를 내어 과감하게 뚜껑을 열고 상자 안을 들여다 본 것이다.
인류문화나 종교사 및 종교사회학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고 하는 사실 하나를 소개해 본다.
1890년대 영국과 프랑스가 남태평양 뉴기니 등 태평양 중부의 섬들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 사이에서 새로 생겨난 일종의 신흥종교라고 할 수 있는 하물숭배(荷物崇拜)라는 것이 있다.
그 지역 섬사람들은 유럽인들이 화물선(貨物船)에서 하물(荷物)을 내려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꺼내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되면서 생긴 믿음이다.
깡통에 담겨있는 음식과 농기구를 비롯하여 라디오 같은 신기한 물건들을 생전 처음 본 원주민들은 이러한 물건들이 신이 준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전통적인 그들의 믿음에 의하면, 자기들이 상용하는 채소나 곡식들이 모두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기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공장에서 만들어 가지고 왔다고 해도 공장이 뭔지도 모르는 원주민들은 그것을 백인들이 자기네만 쓰려고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우리의 신은 왜 이런 물건을 가져다주지 않는지 의문을 가지며 이것을 계기로 온갖 교리와 실천사항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원주민들은 이 물건들이 백인들의 신이 아니라 자기들 조상신에게서 온 것이라고 믿었다.
자기들 조상신이 화산 꼭대기나 다른 섬에 살면서 자신들을 위해 이런 물건을 만들었는데 백인들이 가로채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19년 뉴기니 섬의 바이랄라 마을에서 생긴 ‘바이랄라 광기’는 이런 믿음의 가장 두드러진 예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은 자기들 조상신이 음식이나 담배나 기계나 무기 같은 것을 배에 가득 싣고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그러기 전에 백인을 몰아내고 지금껏 해오던 종교의례를 모두 버려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예언과 믿음에 따라 그들은 농사를 비롯한 일상의 생계를 위한 활동을 중지하다시피하고 유럽인들의 건물을 본떠서 소형 신전도 짓고 깃대나 안테나를 본떠 장대도 세우고 성경을 읽는 흉내도 내고 새로운 의식 절차를 채택했다고 한다.
이제 자기들이 기다리던 신이 오면 일하지 않고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기다리는 하물을 싣고 온다는 신은 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새 날짜를 다시 정하거나 자기들의 준비가 부실해서 못 오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안 보이는 어딘가에 이미 도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하고, 유럽인들이 타고 온 배가 사실은 자기들이 기다리던 배라고 생각하거나, 그 선원들이 바로 기다리던 조상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자기들의 믿음을 고수했다.
2차 대전이 일어나고 미군이 들어오면서 이런 하물숭배는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제는 비행기에 싣고 오고 물건도 그전보다 더욱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하물숭배 사례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1930년대 말쯤 탄나라는 섬에 ‘존 프럼’이라는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한다.
원주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그는 떠나면서 다음에 하물을 많이 싣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며 오기 전에 준비해야할 사항을 일러주고 갔다고 한다.
프럼이 떠난 후 원주민들은 그가 돌아오면 착륙할 수 있는 비행장을 만들고, 나무로 비행기 모형을 만들어 비행장에 갖다 두고 관제탑 같은 모형도 만들고 대나무로 된 안테나에 나무 이어폰도 설치하고 깡똥 쪼가리로 만든 모형 스피커도 만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프럼이 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한다.
이들은 지금도 매년 2월15일이면 그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특별한 종교행사를 한다고 한다.
프럼이 나타나지 않아도 언젠가 반드시 그가 돌아와서 그들이 살고 있는 섬을 낙원으로 만들어 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1999년 카나다의 ‘토론토 스타’ 기자가 방문해서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묻자, 섬사람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오기를 2천년이나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존 프럼을 겨우 60년 기다렸다. 왜 우리를 보고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하는가?”
참으로 새겨 볼 만한 귀중한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종교를 가진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어쩌면 이와 비슷하여 신에 대한 실체를 모르면서 막연히 기대하고 그러한 상황에 길들여져서 맹종하는 잘 못된 믿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신은 없기 때문이다.
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신의 이름으로 의식화 되어 자기가 믿는 신만 주장하고 다른 종교의 불상을 파괴하고 단군상의 목을 자르거나 폭약을 몸에 숨기고 인간폭탄이 되는 맹신은 원주민의 하물숭배보다도 훨씬 더 잘 못된 위험한 믿음이다.
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편견과 집착에 사로잡힌 광기어린 맹신은 백해무익하고 위험천만이며 지탄의 대상일 뿐이다.
그 책임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성서를 잘못 이해하여 복음을 잘 못 전한 성직자들에게 있으며 그로인해 행동하는 무지의 위험으로 세상이 불안해 지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예수님의 뜻을 모르는 그런 성직자들은 천당을 외치면서 성도들의 발길은 지옥을 향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 실제로는 종교를 가장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말씀인 ‘토마스복음서’라는 것이 있다고 앞의 33회째의 글 ‘생각의 차이’에서 잠간 소개한 것 같다.
토마스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114조로 되어 있으며 초기의 기독교도들에 의해 유포되었으나 신약성경의 4복음서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한다. 다시 한 번 소개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이다. 만일 너희들을 이끄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다고 한다면, 새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갈 것이다. 만일 그들이 바다 속에 있다고 말한다면, 물고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갈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 속에 있다. 동시에 너희들 밖에 있다.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을 안다면 너희들은 아버지인 하느님의 아들이 너희들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에 대해서 모른다면 너희들은 가난한 나라 안에 있고 가난함이란 너희들 자신일 것이다.”고 하셨다.
이것은 인성에 내재한 신성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의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과 같은 것이다.
비슷한 예로서, 신약성경의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도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신)에 대해서 물으니,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하셨다.
이처럼 부처님과 예수님은 5백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진리를 전파하셨던 것이다.
신약성경의 ‘탕자의 비유’와 법화경의 ‘장자궁자’의 비유를 비롯하여 법화경과 신약성경에는 유사점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민희식교수의 저서 ‘법화경과 신약성서’에 잘 소개되어 있다.
알고 보면 기독교와 불교는 같은 샘에서 솟아난 샘물이다.
가톨릭은 성경이 73장이고 개신교는 구약성경39장 신약성경27장 66장으로 7장이 줄어들기도 했다.
구약성경의 내용을 보면, 엄한 율법과 유대인의 고난의 민족사를 기록한 것이고, 나머지는 개인의 경험과 선지서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유태교의 기본경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적인 새로운 약속이란 신약(新約)성경의 27권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복음이 기본서이며 불교의 법화경과 비슷하고 사도 바울의 교회와 목회에 관한 내용과 서신은 불교의 고승들의 수행담과 비슷하며 1권의 예언서도 불교와 비슷하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1장 1절은 “여기서부터 예수님을 구약성경과 연결하기 위해서 기나긴 족보를 만들어 인위적으로 연결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17장 12절과 13절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아의 환생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내용도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의 윤회를 통한 전생 에 관해서도 예수님은 제자들께 말씀하셨지만 신약성경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 같다.
성서라는 것이 성인들이 직접 집필한 것이 아니고 성인의 말씀을 제자들이 모여서 기록하고 편집했고 또 전파과정에서 언어와 문자의 한계와 사회적 배경으로 본질이 그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같은 기독교이면서 구교인 천주교는 호칭을 ‘하느님’이라고 하고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등 호칭에서도 차이가 있다.
역사가 승리자의 기록이듯이, 성서 역시 그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과 교단의 실세들의 뜻에 따라 편집의 방향이 결정 되었던 것이다.
불경과 성경을 비교해 보면, 불경은 그 많은 설법이 석가모니부처님 당대의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되었고 혹시 만에 하나라도 부처님의 말씀이 잘못 전해질까 우려되어,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된다. 이것은 사람마다 각자의 업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말씀이라도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느낄 수 있으므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겸손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부터 3천5백년 전부터 1천9백년 전까지 약 1천6백년동안 40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책임편집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가미되고 시대적 배경으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리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혼용되어 있다.
또한 가톨릭의 성경이 77장에서 73장으로 정리되는 것을 보아 시대적 상황이나 교단의 방침에 따라 변하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예수님의 말씀이 신약성경에 편입되지 않고 외전으로 밀린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녀가신지 4백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여 새로운 약속이란 이름의 신약성경을 옛날의 약속이란 구약성경과 함께 기독교의 성서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말씀인 신약성경의 요지는 ‘사랑과 용서’로서 부처님의 말씀인 ‘자비’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불교와 기독교의 사상이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전의 유대교 경전인 구약성경에 너무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어떤 논리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어둠의 역사가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로마교황님께서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기독교가 천주교와 개신교로 갈라지면서 천주교 내부에서도 자성의 계기가 되어 예수회란 수도회를 설립하여 교육선교를 주장하며 세계를 향해 새로운 방법으로 선교에 나서기도 했다.
서강대학과 성모병원등이 있으며, 또한 대표적신부로 서강대학 불란서인 서명원신부가
있으며 그또한 명상에 심취되어있고,성철사상이란 논문으로 불란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바 있다. 2012-11-12 2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