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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있는 명소]나제통문羅濟通門

강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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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있는 명소] 나제통문--신라총각 백제처녀 결혼, 아들은 ‘대한민국 국가대표’

기사입력 2012-11-28 09:41
      
헤럴드경제: 무주=남민 기자]“나, 신라 총각이 요 아랫동네 백제 처녀 꼬셔서 결혼했지. ‘불법’으로 말이야, 허허”

갑자기 무슨 삼국시대 서동요 같은 얘기냐고? 다른 한마디 더 들어보자.

“나 신라사람이지, 근데(그런데) 경상도 사람이 아이고(아니고) 전라도 무주사람이오. 여기 산골까지 모할라꼬 온기고?(무슨 일로 왔냐?)”

전라도 무주 속 ‘경상도 동네’ 사람들의 바로 오늘날 얘기다. 전라도 속 경상도라…? 선뜻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덕유산 자락 나제통문(羅濟通門)이 이 신비스런 얘기들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신라의 라(羅)와 백제의 제(濟)가 합쳐져 양쪽을 오가는 문, 나제통문이 됐다.

좁게 울퉁불퉁하게 뚫린 나제통문.

어릴 때 역사 삼국시대를 배우면서 들었던 나제통문, 오래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그러던 중 3주전에 덕유산 주변을 일주하면서 어둠이 내렸을 무렵 이 나제통문을 통과했다. 어둠이 깔린 나제통문 앞에 혼자 카메라를 들고 서있으니 마치 1400년전 병사들의 함성과 절규하는 듯한 음산한 기운 마저 느껴졌다. 원혼이 떠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순간 머릿카락이 쭈뼉 곤두섰다. 

마치 신라-백제 격전장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설레임도 있었다. ‘동경’했던 곳을 이방인이 밤에 혼자서 들렀으니…주변은 깜깜한 외진 곳인데…그날은 야간 조명을 이용해 사진 몇 장 찍는 것 외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격전지의 흔적도 찾아보고 싶었지만 밤이라 다음으로 기약했다. 그래서 이번엔 작정하고 다시 찾았다. 미리 관련 공부도 더 많이 하고 현장을 꼼꼼이 뒤지러 왔다. 이 마을 백제사람과 신라사람들이 하나되어 더불어 사는 모습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제통문의 전경

나제통문은 무주의 동부지역에 위치한 곳으로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상징되고 있다. 서라벌~부여, 서로의 도읍지로 향하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라가 달랐던 만큼 그래서 통문 아랫마을(서쪽) 백제사람과 윗마을(동쪽) 신라사람들 간 가까운 지척에서도 사투리가 다르고 풍습도 다르다. 1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잠시 시계바늘을 7세기로 돌려보자.

서기 600년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삼국시대를 형성하며 군웅할거(群雄割據)하던 시절이다. 신라 화랑 김유신의 등장으로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가 차례로 패망한다.

하지만 백제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마지막 의자왕은 642년 신라의 서부 주요 성 40개를 잇따라 함락했다. 깜짝놀란 신라는 김유신을 직접 화랑들과 함께 최전방 국경선 나제통문에 배치해 일부를 탈환했다. 나제통문을 경계로 서쪽 백제마을은 주계(朱溪ㆍ지금의 설천면)이고, 동쪽 마을은 신라땅 무산(茂山ㆍ지금의 설천면 일부, 무풍면)이다. 신라 땅이지만 지형적으로 보면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맥을 서쪽으로 넘어와 야트막한 야산을 국경선으로 삼고 있다. 신라는 이미 서기 231년 감문국을 점령하면서 이곳 무풍면 지역까지 확보해 뒀던 땅이다. 

김유신은 이곳 나제통문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덕유산 너머 장수군의 육십령까지 넘나들며 백제와 격전을 치렀으며 서기 660년 마침내 백제를 접수한다.
 

나제통문 앞 절벽 아래의 내천에 형성된 소. 전사한 병사들 시신에 파리떼가 몰려 파리소(沼)라 부른다.

한 나라의 운명이 걸린 전쟁이니 만큼 당시 나제통문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충분히 상상이 간다. 이를 잘 보여주는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통문 바로 앞 백제쪽으로는 구천동에서 내려오는 내천(원당천)이 절벽 아래에 있다. 당시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한 채 물에 잠겼고 이 때문에 내천 물은 온통 핏빛에 파리들이 들끓어 그 늪을 ‘승소(蠅沼ㆍ파리소)’라고 부르고 옆의 바위에 한자로 글을 새겨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파리소에서 나제통문을 올려다 본 모습

김유신이 이곳에 머물며 화랑들과 바둑을 뒀다는 바둑판이 새겨진 넒은 바위 사선암(四仙岩)도 근처 산에 남아있다. 이 바위는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는 전설도 있다.

또 근처 야산에서 수십년 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무연고 유골이 발견돼 통문에서 200~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합장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역사적
사료와 주변의 흔적으로 유추해 보면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전장터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곳은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는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나라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왼쪽은 김유신이 바둑을 뒀다는 전설이 있는 사선암. 오른쪽은 수많은 유골이 발견돼 무연고 묘로 합장한 무덤

백제가 패망하고 통일신라시대가 열리면서 두 지역은 하나의 나라로 됐고 경덕왕 16년(757년)에 무산은 무풍(茂豊)으로 개명되면서 경상도 김천에 속했다가 고려현종 9년(1018년) 때 주계와 무풍이 함께 전라도로 편입됐다. 이후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 무풍과 주계가 합쳐져 오늘날의 무주(茂朱)로 통합 개명됐다.

하지만 나제통문 전투 이후 약 1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뚜렷한 경상도 사투리와 서로 다른 풍습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무주읍내에서는 주민들간의 말투로 어디사람인지 서로가 다 안다.

무풍면 주민 최연표 대표(요식업ㆍ63)는 40년전 아랫마을 ‘백제 아가씨’와 결혼했다. 당시만 해도 ‘불법결혼’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백제 땅에서 보면 신라 사람들이 말을 바꿔 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신라서 백제에 대해 ‘상놈’이라고 하면, 백제선 신라를 “말 기르는 기술도 없는 너희들이 상놈”이라며 서로 양반 상놈 논쟁도 벌였다.

신라쪽 사람들은 백제쪽 사람들에게 ‘물아래(신라쪽 하천이 백제쪽으로 흘러내려가는 아랫마을 지칭) 가시내하고는 결혼 안한다”하고 백제쪽 사람들은 “신라 사내 새끼들은 물러빠져서 여자를 거느릴 수 없다”고 해서 서로 결혼도 안했다는 것. 그러니 최 대표는 불법결혼한 것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이랬다.
 
나제통문에 얽힌 이야기와 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해준 최연표 대표와 오석환 선생

지금은 자유결혼을 하고 서로 감정없이 아주 좋은 사이지만 간혹 할아버지 세대는 여전히 결혼한다고 하면 “저 미친 놈 아이가(아니냐)” 하며 그 풍습을 간직하고 있다.

제사 등 생활상도 많이 다르다. 상차림도 다르지만 제사도 백제쪽에선 전날밤 10시에 지내고 신라쪽은 2시간 늦은 자정에 지낸다. 바로 이웃마을끼리 이렇게 다르다.

최 대표는 자신의 사투리에 대해 “경남 거창, 경북 김천을 아울러 경상도 사투리가 90%고 충북 영동, 충남 금산을 합쳐 충청도말이 5%, 그리고 전라도 사람인 내가 전라도 사투리는 5% 밖에 안된다”고 말했다. 무주가 전라북도지만 경계를 이룬 도(道)가 경남북, 충남북 이렇게 4개도와 접하고 있어서다.

그래서 재밌는 일화도 많다. 최 대표와 오석환 선생(무풍면ㆍ60) 역시 백두대간 너머 경상도 김천 대덕이나 거창으로 가면 전라도 사람이라고 멸시받을테지만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한번도 나쁜 일이 없었다. 또 전라도에서는 주민등록 본적이 ‘전라북도 무주군’으로 돼 있어 엄연한 전라도 사람으로 어울려 잘 지낸다고 했다.
 
나제통문 바로 위 야산 바위에 새겨진 글자들. 이부영 무주군청 문화관광해설사가 가리키고 있다.

오 선생은 100% 경상도 사투리다. “나는 신라사람이고 또 전라도 사람이지”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외지인인 기자가 이곳 무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마을에 사시냐”고 물으면 첫 마디가 “여기 신라땅이고, 나 신라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전라북도 무주사람이지”라는 말도 잇는다. 그들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고 하지, ‘경상도 사람’이라고 하진 않는다.

이부영 무주군청 문화관광 해설사는 “면 소재지만 돼도 외지인들의 왕래가 심해 조금 희석됐지만 마을 단위로 들어오면 아직도 옛 풍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해설사는 “그렇지만 서로의 감정 따위는 일체 없고 모두가 무주사람으로 자부심을 갖고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는 이것이 무주의 저력이 되고 있다고도 했다.

최 대표는 장성한 딸 하나와 아들 둘이 있다. 셋다 무주가 낳은 대한민국 최고의 스키선수가 됐다. 불모지 스포츠, 스키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바꿔놓은 장본인들이다. 김용화 감독의 영화 ‘국가대표’에 나오는 최흥철 선수가 최 씨의 막내 아들이다. 한국체대를 나와 현재도 국가대표다. 영화에서 하정우와 김동욱이 펼치는 스키점프를 최흥철이 실제 연기했다.

딸 송화씨는 현재 캐나다 밴쿠버 한국방송 아나운서다. 장남 능철씨는 전라북도 스키협회 전무이사로 재직 중이다. 3남매 모두 스키 국가대표 출신이다.

나제통문의 슬픈 역사를 안고 신라총각과 백제처녀가 결혼해 그 자녀들이 ‘대한민국 국가대표선수’가 됐다.
 

■ 나제통문
: 지금은 군산에서 시작한 30번 국도가 무주읍을 거쳐 터널을 통과한다. 나제통문을 지나 성주, 대구로 향하는 길목이다.
 
2차선 도로가 터널에선 1차선으로 좁아진다. 터널 길이라 해야 고작 30~40미터 정도. 곡괭이로 쪼아놓은 듯한 벽면이 더 정겹다. 빈티지한 터널이다.

나제통문이 있는 석모산의 지형을 보면 재미있다. 덕유산 자락이 북쪽으로 흘러흘러 끊어질듯 겨우 꼬리 하나 가늘게 연결된 곳으로 마치 모자 모양을 닮았다 해서 석모산(石帽山)이라 불린다. 주민들은 석견산이라고도 한다. 해발 404m의 석모산이 볼록 솟아오르기 직전 끊어질 듯 가늘게 개미허리 처럼 연결된 부분에 나제통문을 뚫었다. 그게 가장 경제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뜻 이해가 안간다. 왜 굳이 이 터널을 뚫어야 했는지를. 험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신라 백제가 굳이 전투를 위해서 뚫었을까. 동쪽 신라마을의 남대천을 따라 몇백 미터만 내려가면 서쪽 신두마을의 원당천과 만나는 평지인데 왜 굳이.

지금도 터널입구 바로 위쪽에 보면 한자로 ‘羅濟通門(나제통문)’이라고 쓰여있다. 언제 누가 왜 뚫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한편에서는 일제 강점기때 물자수송을 위해 뚫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원래 삼국시대에 좁은 구멍이 있었고 일제시대에 길을 내기 위해 뚫었다는 주장이다.

어쨌든 1400여년 전 삼국시대 격전장으로서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바친 국경선이라고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나제통문은 무주구천동 관광의 출발점이다. 아름다운 구천동 33경 중 제1경으로 사랑받고 있다. 바로 이웃에 벚꽃거리와 반딧불이 박물관 반디랜드, 그리고 37번 국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무주리조트, 무주구천동계곡 등 명소들이 즐비해 사계절 가족여행지로 좋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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