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시인 특별기고]백낙청은 한류-르네쌍스 가로막는 `쑥부쟁이`
강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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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저항시인의 상징으로 불린 김지하 시인이 최근 박근혜 후보 지지선언을 한 데 이어 이번엔 <조선일보> 기고를 통해 문학평론가이자 진보진영의 좌장 격으로 불리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맹비난해 파문이 일고 있다.
김 시인은 4일자 <조선일보> 특별기고(‘한류-르네상스 가로막는 ‘쑥부쟁이’)를 통해 백낙청 교수를 두고 “못된 쑥부쟁이가 한류-르네상스의 분출을 가로막고 있다, 잘라 말한다. 자칭 한국 문화계의 원로라는 ‘백낙청’이 바로 그 쑥부쟁이다”라고 쓰고는 그 근거로 열 가지를 들었다.
김 시인은 우선 “백낙청은 한국 문학의 전통에 전혀 무식하다. 그저 그런 시기에 ‘창비’라는 잡지를 장악해 전통적인 민족문학 발표를 독점했을 뿐”이라고 말문을 열고는 “수십년 동안 창비출판사에서 단 한 번도 지나간 한국 시문학사의 미학적 탐색을 시도한 적이 없다. 무식 때문”이라며 백 교수가 창간한 창비(<창작과비평>)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이어 김 시인은 문학평론가인 백 교수의 평론 활동에 대해 “긴 세월을 내내 마치 한국 문화사의 심판관인 듯 행세해왔고 그 밑천을 겨우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소설가 몇 사람 공부한 것으로 내세워왔다”며 “그의 평론 행위는 평론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그것은 공연한 ‘시비’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김 시인은 또 백 교수의 ‘사상적 스승’으로 불리는 언론인 리영희 선생에 대해서도 “‘리영희’는 과연 사상가인가? 깡통 저널리스트에 불과하다.”고 비난하고는 백 교수를 향해 “정치관도 없는 자가 무슨 정치평론을 하느냐, 내가 ‘깡통 빨갱이’라고 매도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알라”고 노골적 비난을 퍼부었다.
최근 백 교수가 야권후보 단일화 등 시국현안에서 목소리를 낸 것과 관련해서도 비판을 비켜가지 않았다. 그는 “계속되는 졸작 시국담에 이어 ‘2013 체제’라는 설을 내놓았다. 그것도 시국 얘기인가? 아니면 막걸리에 소주를 섞어 먹은 상태인가? 그런 짓 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고는 “사회에서 ‘원로’ 대접을 받기 전에 먼저 삶의 ‘원로’가 되어야 하는 법”이라고 일갈했다.
김 시인은 백 교수가 창간한 문학비평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여러 차례 작품을 발표하고, 1982년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비롯해 <유목과 은둔> <절, 그 언저리> <대설 남 1,2,3> 등을 출판사 창작과비평사를 통해 발간해 왔다. 다음은 김지하 시인의 4일자 <조선일보> 특별기고 전문이다.
4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김지하 시인의 특별기고
[조선일보 특별기고] 한류-르네상스 가로막는 ‘쑥부쟁이’ / 김지하 시인
원주의 부론·문막 옆 손곡에 있는, 고려 이전부터 유명한 법천사(法泉寺)와 새로이 등장한 거돈사(居頓寺). 두 절 사이가 매우 가까운데도 길이 없다. 시퍼런 독초와 독거미풀만 무성하다. 법천사의 섬세·심오한 유식학인 법상종과 참선으로 일관한 거돈사의 선종(禪宗) 사이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길래? 그곳은 컴컴 칠흑 속 텅 빈 지름길 위에 못난 쑥부쟁이가 한 송이 피어 있을 뿐이다.
이 부근엔 절절한 사연을 가진 장소가 많다. 견훤이 15만 정예 병력으로 문막을 노리며 기다리던 후용. 궁예와 왕건이 수십만 대군을 부딪쳐 싸운 문막 벌판. 오대산 월정사까지 이어지는 구룡사를 비롯한 화엄 사찰들. 여성적 경제 원리의 상징인 팔여사율(八呂四律)이라는 이름의 월봉. 그 봉우리 옆에 충청도의 단강, 강원도의 섬강, 경기도의 남한강이 합수(合水)하는 ‘흥원창’.
절절한 사연을 가진 장소가 주변에 즐비하건만 법천사·거돈사 사이에는 독초·독거미풀·쑥부쟁이가 버티고 있다. 우리 문화계도 똑같다. 곳곳에 막강한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건만 독초·독거미풀에 이어 머얼건 쑥부쟁이같이 누군가 길목을 막고 버티고 있다.
싸이의 말춤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바마가 참석하는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다. 욘사마에 이어 한류의 붐이 와 있다. 한류-르네상스의 핵은 ‘시와 문학의 참다운 모심’이다. 그런데 이 못된 쑥부쟁이가 한류-르네상스의 분출을 가로막고 있다. 잘라 말한다. 자칭 한국 문화계의 원로라는 ‘백낙청’이 바로 그 쑥부쟁이다. 왜?
첫째, 백낙청은 한국 문학의 전통에 전혀 무식하다. 그저 그런 시기에 ‘창비’라는 잡지를 장악해 전통적인 민족문학 발표를 독점했을 뿐이다.
둘째, 백낙청은 한류-르네상스의 핵심인 ‘시’의 ‘모심’에서 가장 중요한 리듬, 즉 시 낭송의 기본조차 전혀 모른 채 북한 깡통들의 ‘신파조’를 제일로 떠받들고 있다. 우리 시 문학의 낭송에는 적어도 아홉 가지의 당당한 방법이 있는데도 여기에 대해선 전혀 무식하다.
셋째, 수십년 동안 창비출판사에서 단 한 번도 지나간 한국 시문학사의 미학적 탐색을 시도한 적이 없다. 무식 때문이다.
넷째, 그는 그 긴 세월을 내내 마치 한국 문화사의 심판관인 듯 행세해왔고 그 밑천을 겨우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소설가 몇 사람 공부한 것으로 내세워 왔다.
다섯째, 그의 사상적 스승이라는 ‘리영희’는 과연 사상가인가? 깡통 저널리스트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리영희를 앞세워 좌파 신문에서 얄팍한 담론으로 사기행각을 일삼는다.
여섯째, 그의 평론 행위는 평론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그것은 공연한 ‘시비’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박경리 씨의 소설 ‘시장과 전장’에 관한 평이다. 그것도 문학 평에 속하는가? 너절하고 더러운 방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발표하고도 ‘심미 의식’인가?
일곱째, 그 깡통 같은 시국담이다. 무슨 까닭인지 그의 입은 계속 벌려져 있는 상태다. 그렇게 벌린 입으로 과연 지하실 고문은 견뎌냈을까? 그런데 하나 묻자. 백낙청은 지하실에 가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여덟째, 계속되는 졸작 시국담에 이어 ‘2013 체제’라는 설을 내놓았다. 그것도 시국 얘기인가? 아니면 막걸리에 소주를 섞어 먹은 상태인가? 그런 짓 하면 안 된다. 그러고도 ‘원로’라니?
아홉째, 백낙청은 우선 정치관부터 바로 세워라. 그런 것도 없는 자가 무슨 정치 평을 하는가? 내가 ‘깡통 빨갱이’라고 매도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라! 마르크스는 읽었는가? ‘자본론’은 읽었는가? ‘경제학·철학본고’는? ‘도이치 이데올로기’는?
열째, 마지막으로 묻자. 문학을 해서 날조하려는 것이냐? 본디 ‘시 쓰기’는 고통의 산물이다. 사람은 사회에서 ‘원로’ 대접을 받기 전에 먼저 삶의 ‘원로’가 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제 이 민족은 지난 시절을 훌쩍 벗어던지고 있다. 이번 선거의 개 똥구멍 같은 온갖 개수작들이 역설적으로, 과거가 끝났다는 증거이다. 문학자는 참된 마음으로 문예를 부흥시켜 이 나라를 ‘문화대국’으로 키워가야 한다. 이게 바로 15세기 피렌체 르네상스에서 배워야 하는 테마다.
각오가 돼 있는가? 스스로를 욕할 준비가 돼 있느냐는 것이다. 손곡 쑥부쟁이가 스스로 사라지는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뜻밖에도 많다. 알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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