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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특수부대원' 김신조 "김일성, 朴 대통령을…" 충격 고백

남양주=전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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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1.19 03:02

[1·21사태 때 유일하게 생포됐던 무장공비… 김신조 목사 인터뷰]
"2010년 만난 朴 당선인이 싫은 내색않고 맞아 감사했다"
"좌파들의 협박전화 많이 받아… 저 때문에 고통받은 분 위해 사죄하고 기도하며 살아"

"김일성은 당시 남한의 산업 발전이 박정희 대통령의 공로라는 걸 인정했어요. 더 시간이 지나면 한국의 공산화가 힘들 것이라고 판단해 빨리 죽이려고 한 겁니다."

1968년 1월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다"던 북한 특수부대원 김신조(71)는 45년이 흐른 뒤 노(老) 목사가 돼 있었다. 그는 함께 내려온 북한 무력부 총정찰국 124군 부대원 31명 중 우리 군(軍)에 생포된 유일한 인물이다. 김 목사는 11일 경기도 남양주시의 한 성경교육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매스컴에 나올 때마다 좌파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까불지 말고 조용히 살아라'는 협박 전화를 자주 받았다"며 "저 때문에 고통받았던 수많은 분께 사죄하고 도와준 분들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우리나라 안보에 도움이 되도록 기도하고 살아남겠다"고 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단 31명을 이끌고 청와대를 습격했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신조 목사가 지난 11일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성경교육관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덕훈 기자
김일성은 1972년 5월 방북한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1·21사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말 미안한 사건이다. 나도 몰랐다. 우리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들이 한 짓"이라고 했었다. 이에 대해 김 목사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은 원래 미 대사관과 미8군 기지, 국방부, 육군본부, 서대문형무소 등을 우선 접수하도록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며 "김일성이 '다른 것보다 박정희부터 빨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엘리트 특수부대원만 31명을 뽑아 급히 내려보낸 것"이라고 했다.

김신조 일당은 1968년 1월 21일 밤 청와대 약 300여m 앞에서 최규식 당시 종로경찰서장에게 저지당하자 총격전을 시작했다. 김 목사는 "당시 수경사 30대대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는데 이 부대와의 교전에서 깨지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생포될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내가 수류탄을 깠는데 불발이 돼서 잡혔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냥 손들고 나온 것"이라며 "당시 26세인데 김일성을 위해 죽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고 했다.

김 목사는 사상 전향을 한 후 1970년 4월 사회로 나왔다. 그는 "당시 한국은 도시든 농촌이든 북한보다 훨씬 사정이 어려워 보였다"고 했다. 김 목사는 "그런데 1970년 새마을운동 시작되고 경부고속도로 생기면서 한국이 빨리 발전하는 게 눈에 보였다"며 "'이래서 김일성이 박 대통령을 빨리 제거하려고 했구나'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2010년 10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빈소에서 박근혜 당선인을 만났다고 한다. 김 목사는 "그때 사과할 겨를도 없이 박근혜 당선인이 다가와서 '여기서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의한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인데 싫은 내색을 안 해서 감사했다"고 했다. 김 목사는 "내가 살아남지 않았더라면 북한은 청와대 습격 사건도 끝까지 잡아뗐을 것"이라며 "천안함 폭침 날조극 운운은 북한의 상투적 수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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