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붓다의 말씀이 매력을 상실한 이유 [법인스님]
허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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依言眞如 의언진여
-언어는 무죄다-
내 앞에는 경전이 놓여있다. 아함에서 화엄까지, 경율논 삼장에서 선대 조사의 어록까지. 그 가르침은 종횡으로 경계가 무한하고 뜻은 심오하다. 깊고 깊어서 그만 바닥이 명징하게 드러나 보이는 깊음이며, 넓고 넓어서 뭇 존재의 자리에 서 있는 넓음이다. 그렇다. 팔만장경은 언제 어디서나 모두의 눈앞에 펼쳐 있기에 심심미묘하다. 광대무변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경전을 앞에 두고 가슴이 먹먹하다. 뭇 생명의 가슴에서 광휘를 뿜어내야 할 문자반야가 빗장을 걸고 세상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다. 경전이 번역의 옷을 입고 설법의 걸음으로 세상으로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세상이 그에게 눈길을 주고 귀를 열어 주지 않는다. 하여, 오늘 경전은 광장에 있으나 밀실에 갇혀 있다.
*팔만대장경. 출처: 해인사 홈페이지
오늘날 붓다의 말씀이 매력을 상실한 이유는?
왜 붓다의 말씀은 광장에서 길을 잃었을까? 이유는 간명하다.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매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석가모니 붓다와 그의 말씀이 유익하고 매력이 없는 것인가? 모두가 말할 것이다. '아니다'라고. 그렇다면 다시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매력을 상실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고. 이 또한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경전을 열람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풀이하는 자의 몫이라고.
법회에 나가지 않는 불자들을 보게 된다. 그들 중에는 청소년 시절부터 대학생 시절까지 신행한 불자들이다. 수계하고 사찰에서 운영하는 불교대학에서 교리공부도 한 불자들이다. 보시도 하면서 불자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재적 사찰을 정하고 정기적인 법회와 신행을 하지 않는다. 그 연유를 물었더니 까닭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법문이 가슴에 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그 사찰이 지향하는 신행이 자기 삶에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불자들이 혹여 오만하고 교리와 지식 위주의 불교관을 가지고 있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자세하게 말을 들어 보니 역시 그럴만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법회에 가서 법문을 들어 보면 대체적으로 준비를 많이 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성의 없는 법문이란 무엇보다도 현실에서 벗어난 주제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주제 선정에 대한 고민과 연구가 매우 안이하다는 반증이다. 법문은 곧 중생의 삶의 물음에 대한 응답이며 중생의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다. 그래서 우리는 붓다를 세간의 문제를 잘 이해하고 해소해 주시는 '세간해 世間解'라고 칭명하지 않는가? 붓다의 말씀이 나에게 유익하고 매력이 있다는 것은 곧 그의 말씀을 통해서 내 삶의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말씀과 그 실천을 통해서 내가 보다 변화하고 성숙하며 환희와 감동의 참된 결실을 맺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법문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게도 소중하고 절실함에도 법문의 실상은 어떠한가? 교리에 대한 박제된 해석, 기계론적인 인과법문, 바른 통찰과 실천을 결여한 기도와 공덕, 세상에 대한 연민과 바람을 외면한 마음 수행, 설화와 큰스님들의 일화와 기행 등을 주제와 내용으로 말하고 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불교는 마치 먼 나라 딴 나라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 석가모니 붓다 이래로 지금까지 세계종교로 자리 잡고 있는 종교이다. 불교가 세계종교가 된 이유는 그 가르침이 시대와 역사를 통해서 보편적이고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보편성과 대중성은 곧 늘 당대의 현실과 바람에 지혜와 자비로 응답했을 때 획득되는 것이다.
"나의 가르침은 희론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와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볼 수 있는 법이며, 누구라도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다. 그 결실은 현실에서 곧바로 사실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향상으로 인도하는 법이다."
이와 같이 초기경전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이 '지금' '여기' '사람'에게 유용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삶을 '향상'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붓다와 제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언어로 이야기 했던 것이다.
"비구들이여,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 법을 설하라. 또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행을 드러내 보여라.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으니 법을 들으면 깨달을 것이다. 나도 법을 설하기 위하여 우루웰라의 세나니가마로 가리라."
붓다의 전법선언에는 보편 법을 전하는 목적과 방법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중생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논리적이고 효율적인 방편언어로 법을 설명하라는 것이다.
말의 중요성에 주목해야
여기서 오늘 우리가 주의하고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말'의 중요성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와 통틀어 불교만큼 방대한 분량의 전적을 가지고 있는 종교는 없다. 달리 말해서 불교는 말씀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곧 말의 종교인 것이다. 저 사르나트 사슴동산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붓다의 말을 통해서 세상에 출현했으며, 이후 제자들은 붓다의 말씀을 듣고 사유하고 실천하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말을 듣고 그 가르침을 침묵으로 사유했으며, 침묵의 사유로 걸러지고 체험된 진리를 다시 말로 전했다. 말과 침묵, 언어의 덫에 갇히지 않는 이언진여(離言眞如)와 언어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언어로 드러내는 의언진여(依言眞如)의 경계가 분명하면서도 그 경계의 소통이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은 법에 대한 의심은 곧 말을 통해서 물었으며 토론하고 수정하고 확신했다. 대화와 토론은 수행의 중요한 방법이었다. 붓다와 제자들의 문답, 동료수행자들과의 대화와 토론, 세간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세상의 진리, 이 모두가 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말'은 그냥 발성어가 아닌 진리를 담은 말이었다. 그래서 대승경전은 말에 '문자반야'라는 날개를 달아 주었던 것이다.
*다양한 불교 서적들. 출처 : 조계종출판사 홈페이지 갈무리
그러나 이렇게 방대한 경전에서 보듯이 말의 소중함과 효용을 잘 알면서도 불교는 말의 한계와 함정 또한 놓치지 않는다. 불교가 전법의 종교임과 동시에 수행과 철학의 종교라는 것이 여기에서 확연해진다. 그래서 붓다는 때로는 침묵으로 법을 드러내고 응답했다. 중관불교와 유식불교는 언어와 그 개념의 한계와 위험성을 논리적인 체계를 갖추어 경고한다. 더 나아가 선종불교는 사유와 언어를 넘어 '마음에서 마음으로' 영역을 확장한다. 어떻게 보면 불교는 말과 침묵. 말의 긍정과 말의 부정이 두 축의 수레바퀴로 전개된 역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의 정신과 수행이 면면히 이어진 한국불교에서 늘 언어와 문자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사교입선 불립문자(捨敎入禪 不立文字)의 언명에서 보듯이 오늘에 이르러서도 언어와 문자, 곧 '말'은 늘 위험과 부정의 대상이다. 그러면서도 선종은 방대한 양의 전등사서를 가지고 있으니 참으로 묘하다 할 것이다. 이는 자칫 수행자가 객관적인 지식에 의존하여 주체적이고 활발하고 창의적인 정신을 외면하고 타성의 늪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지 결코 언어와 문자의 효용을 부정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명심하자. 말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말을 활발하게 살려내야 한다는 것을.
말은 더없이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임을 확신하자. 언어와 문자에 대한 경계와 부정은 곧 언어와 문자에 대한 혐오와 불신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여기 '불을 조심하라, 불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라는 문장이 있다. 그러면 이 문장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불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어야 할까? 아니면 불의 위험성을 잘 알고서 조심스레, 그리고 잘 사용하라고 읽어야 할까? 또 '몸은 더러운 것이며 혐오스러우며 마침내 낱낱이 흩어질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몸을 학대하고 미워하고 무관심해야 하는가? 아니면 몸에 대한 맹목적 탐닉과 집착에서 벗어나 몸을 잘 운용해야 하는가? 답은 명백하다. 그것에 대한 '잘못된 견해와 집착'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지 '그것'의 거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가 언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를 떠나서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은 곧 삶의 전부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말은 곧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은 그저 소통의 수단과 도구가 아니다. '말'은 곧 '생각'이다. 다시 말해 '생각'이 곧 '말'인 것이다. 가령 내가 누구에게 매우 거칠고 모진 말을 하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매우 거칠고 모진 말은 거칠고 모진 생각과 별개의 영역에서 발화된 것일까? 그것은 누구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그대로 드러남이다. 그래서《중론》에서는 "생각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언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 心行處滅 言語道斷 -"라고 하는 것이다.
말과 생각에 연관성에 관련해서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1908~1961)의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말하는 사람은 말하기에 앞서 생각하지 않으며 말하는 동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의 말이 생각 자체인 것이다. ···· 생각은 내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세계와 말의 밖에 있지도 않다. 그 점에서 우리를 속이는 것, 표현 앞에 대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 이것은 이미 구성된 것이자 이미 표현된 생각들이며, 이것들을 우리는 말없이 스스로에게 회상시키고 이것들에 의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내적인 삶의 환상을 제공한다. -『지각의 현상학』가운데서-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말하는 사람의 말이 생각 그 자체'라는 것, 또한 '생각은 내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세계와 말의 밖에 있지도 않다'는 통찰과 지적이.
때문에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성찰과 모색, 그에 대한 인식과 애정, 그리고 삶에 대한 모든 생각이 바로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팔만장경의 모든 '말'은 바로 붓다와 선사의 '삶'이며 '생각'이며 '몸짓'이며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법을 설하고 법을 듣는 자리에서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말하고, 누구에게 말하고, 왜 말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에게 말해야 하고, 그 사람들의 관심에 대해 말해야 하고, 그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눈을 열어주는 말을 해야 하며, 그래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이 곧 말이라는 사실이 확연하지 않는가? 그래서 나의 말은 곧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 속에서 내 삶의 총체적 집약이고 드러남이다. 그럼에도 어찌 법회 준비를 소홀히 하고 법문의 주제와 내용, 전개 방법에 철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오늘'의 말, '우리들'의 말로 법을 설하고 토론했으면 한다. 대개 불교계 안이나 밖에서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 볼멘소리가 많이 들려온다. 그 까닭을 들어보면 사용하는 말이 너무 이질적이고 어렵다는 것이다. 이질적이라는 말은 지나친 한자용어와 걸러내지 않은 불교전문술어가 너무도 빈번하게 사용되어 말하고자 하는 요지와 맥락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세상은 비로자나불의 법신이 상주하는 정토입니다." "중중무진 법계연기의 화엄세계입니다." "일체가 공합니다. 인도 공하고 연도 공하고 과도 공합니다." "일체가 공하니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불법은 중도가 제일의제이니 이것도 저것도, 옮고 그름도 다 내려놓고 중도적으로 보십시오." "일념과 무량겁이 상즉상입합니다."
붓다는 일반 대중의 언어로 말하고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법을 설했다
법문 중에 이런 술어가 예사롭지 않게 일상적으로 사용되면 불교 밖의 다른 학자들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말한다. 붓다는 일반 대중의 언어로 말하고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법을 설했다고. 실제 붓다는 출가대중과 재가대중에게 그 시대에 널리 보편화된 용어를 채택했고, 매우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득했으며, 당대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사례와 비유로 소통하고 공감했다. "나무는 기운 쪽으로 넘어진다."며 올바른 생각과 꾸준한 정진을 당부했으며, "바람을 향해 흙을 던지면 도리어 자기에게 흙이 온다."라며 타인을 비방하지 말라고 하였다. 연못에 잠긴 돌을 두고 '돌아, 떠올라라. 돌아, 떠올라라' 하면 결코 떠오를 수 없다면서 자신의 행하는 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길에 버려진 비린내 나는 새끼줄과 향내 나는 종이를 들어서 사람의 인격은 환경과 습관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지 결코 선천적으로 영원히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하였다. 쉬운 비유를 들어 계급의 허상을 타파했으며 연기와 무상, 무아의 진리도 현실에서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사례와 비유를 들어 이해시켰다.
불교가 이렇게 석가모니 붓다 당시에 대중적인 종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붓다가 깨달은 법의 보편성과 위대함. 수행승단의 도덕적 권위. 그리고 시대의 관심과 요구를 대중의 언어 설명하고 소통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오늘날 법정 스님, 법륜 스님, 정목 스님, 혜민 스님의 대중집회와 글들이 호응을 받는 것도 바로 오늘 우리들의 관심과 오늘 우리들의 눈높이와 오늘 우리들의 언어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법문을 듣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 출처: 정토회 홈페이지
언어와 문자가 권력인 시대가 있었다. 어려운 한자를 독점하던 중세 시대에 동아시아에서는 문자를 해독하는 자가 권력을 차지했다. 또 서구에서는 성서의 해석을 사제들이 독점하면서 교회는 세속에까지 절대적이고 독점적인 권위를 형성했다. 그러나 독점은 독선과 독재를 낳으며 인권을 침해하고 억압과 긴장의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고 다수의 권리와 행복을 억압한다. 그래서 언어와 문자의 대중화는 세속에서는 민주화를 이루고 종교에서는 진정한 신앙이 자리 잡을 수 있는 터전이 된다. 16세기 초반 마르틴 루터는 라틴어로 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가톨릭의 권위주의를 해체하고 신앙을 민중에게 돌려주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불자들은 말의 혁명적 운용을 통해 사고의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 단순히 한글로 번역된 경전으로 공부하고 우리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말의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삶과 생각에 주목하고 집중했을 때 마침내 말은 혁명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대중의 관심을 외면하면 우리는 대중에게 외면당한다.
대중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대중은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말은 나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혁명이며 대중에 대한 애정이다.
자! 이제 우리는 늘 오늘을 탐색하고 우리들의 언어로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출처 :강화55 글쓴이 : 高麗山-寂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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