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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佛道 대가[탄허스님] 탄생100주년,입적30주년 기념사업.

강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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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가 말했다, 공부하라 또 공부하라

[중앙일보] 입력 2013.03.18 00:43 / 수정 2013.03.18 00:43

탄생 100주년, 입적 30주년
김광식 교수 『방산굴의… 』

탄허 스님은 한국 현대불교의 대표적 학승이었다. 수도원 설립, 사찰운영, 불경 강의 1인 3역을 맡으며
불교의 청정심 회복을 노렸다. 그는 평소 “승려가 됐다면 모름지기 공부에 충실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사진 월정사]

“인재를 발굴해 한국불교가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법당 100채를 짓는 것보다 스님을 공부시키는 게
더욱 중요하다.”

 1966년 불경 번역기관 동국역경원 개원식에 참석했던 탄허(呑虛·1913~83) 스님의 말이다. 선불교 전통이 강한 한국불교에서 탄허는 공부와 교육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한국불교의 근본을 찾는 데 매진했다. 그가 필생의 사업으로 추진한 70여 권의 불경 역해도 이런 소신의 결과물이다.

 탄허는 유불선을 아울렀던 한국불교 최고의 학승으로 꼽힌다. 각종 예언 등 상식을 뛰어넘는 도력(道力)도 전설처럼 전한다. 하지만 생전 업적에 비하면 지금까지 스님에 대한 관심은 뜸했던 편이다. 스님의 탄생 100주년, 입적 30주년을 맞아 본격적인 재조명 작업이 시작된다. 학술·출판·전시 등 다양한 기념사업이 펼쳐진다. 스님이 머물렀던 오대산 월정사의 후학들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 <표 참조>

김광식
 동국대 불교학술원 김광식(56) 교수가 엮은 『방산굴의 무영수』(상·하권) 역시 기념사업의 하나다. 김 교수가 2년간 탄허의 도반·제자 수십 명을 만나 채록한 증언록이다. 방산굴은 탄허가 수행했던 건물이다. 무영수(無影樹)는 ‘그림자 없는 나무’를 뜻하는 불교용어다. 김 교수를 전화로 만났다.

 - 책을 내기 전과 후, 탄허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나.

 “탄허는 단순히 유불선에 회통한 대강백(大講伯·뛰어난 강사)이 아니었다. 승려라는 그릇 안에 가둬두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면모를 지녔다. 유불선을 이해하는 정치가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1956년 오대산 수도원을 세워 속가(俗家) 제자를 양성했다. 그를 따르는 서울대 법대 제자들 모임이 있었을 정도다. 양주동 선생도 스님의 장자 강의를 1주일 듣고는 ‘장자가 살아 와도 이만 못할 것’이라고 했다지 않은가.”

 - 그렇다면 탄허는 천재였나.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증산도 교단의 고위직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도교를 자연스럽게 접했고, 10대 때 각종 유교 경전에 통달했다. 누군가 숱한 경전을 줄줄 외우는 비결을 묻자 ‘그냥 외워지는 게 어디 있느냐, 남들 10번 읽을 때 나는 100번 읽고, 100번 읽을 때 1000번 읽는다’고 답했단다.”


 - 강의 능력은 어땠나.

 “동양 사상 전체를 꿰뚫었기 때문에 비교 설명하는 데 탁월했다. 강의 녹음을 들어보면 자신만만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강의가 막힘이 없어 더 설득력이 크다. 노트나 책 한 권 없이 백묵 하나 갖고 서너 시간 강의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예언 능력을 어떻게 봐야 하나.

 “그의 각종 예언은 100가지가 넘는다. 맞는 것도 있고 틀리는 것도 있다. 장자와 주역을 1000번씩 읽었다는데 그만큼 세상 질서의 변화에 관심이 컸던 거다. 희망의 메시지, 긍정적 미래 전망을 심어주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 왜 지금 탄허인가.

 “불교가 민족과 인류의 역사·문화에 기여하려면 세상 돌아가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그런 스님은 찾기 어렵다. 그래서 탄허의 재조명이 필요하다.”

신준봉 기자

◆탄허 스님=전북 김제 출생. 1934년 상원사에서 출가.
조계종 중앙역경원 초대원장을 지냈다.
『화엄론』 『반야경』 『능엄경』 등 많은 불경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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