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나는 북 해안포 땅굴 속 참상을 보았다
허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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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 자유북한방송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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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12.27 23:11 | 수정 : 2010.12.28 03:04
나는 해주에 있는 4군단 예술선전대 창작조에서 근무했다. 내가 관할부대인 연평도 앞의 33사단 직속 해안포 중대원들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5년 전인 1985년 겨울 '중대예술소조공연'이었다.
군인들 사기를 올리는 게 내 임무였지만, 90명도 안 되는 중대 군인 가운데 10명 이상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참담할 따름이었다. 바닷바람 탓인지 중대원들의 손등은 거북이 잔등처럼 갈라져 있었다. 북한의 서남단 끝자락에 자리 잡은 개머리 해안포 진지인지라 도로는 달구지길을 조금 넓힌 게 전부여서 눈이 조금 와도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신발은 1년에 한 켤레, 엄동설한의 바닷바람과 맞서야 할 겨울용 솜옷은 2년에 한 벌이었다. 무엇보다 군복무 10년간을 갱도(땅굴)형 포진지에서 생활해야 하는 저들에겐 허리병과 관절염이 치명적이었다. 1960년대에 만들어져 보수공사 한 번 해 본 적 없는 갱도 벽면은 늘 습기로 번들거렸고 잦은 정전 때문에 습기방지용 전열기라는 것도 무용지물로 처박혀 있었다.
1994년 군관(장교)이 되어 9년 만에 해안포 대대를 다시 찾았다. 개머리 초소의 소대장이었던 친구는 대대장이 되어 있었는데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봄철이어서 특별히 그렇다고는 하지만 모르는 소견에도 관절염으로 완전히 골병이 든 듯했다. "그러다 아주 쓰러진다. 군의소라도 좀 가보라"고 하자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고 하고 말았다.
이들은 내가 처음 보았을 때부터 10년 동안 "전쟁 나면 우리는 다 죽는다"는 같은 말을 계속했다. 그동안 꼭 죽는 연습만 한 사람들 같았다. 대대장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죽을 각오'를 노래처럼 읊조리고 있었고 저들이 '죽을 위치'에 서 있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김정일의 정신적 노예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과 헤어져 나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삶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오순도순 행복한 가정마저 꾸려가고 있다. 이처럼 소중한 내 삶을 향해 김정일과 그에 의해 길들여진 정신적 노예들이 포격을 가해왔다. 내 조국 대한민국을 향한 또 다른 포격과 참화를 호언하기까지 한다. 오로지 사람 죽이고 죽는 얘기만 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가꿔가는 사람들을 죽이려 한다.
김정일 왕조의 가병(家兵)이 되어 10년 세월을 맹목적인 충성경쟁 속에 살아야 하는 북한 군인들에게 "이제 김정일을 향해 총부리를 돌리는 길만이 당신들이 사는 길"이라고 외치고 싶다. 자신을 위해 가병들이 죽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김정일을 향해 정의의 포신을 돌려야 할 때라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싶다.
개머리 진지의 북한 군인들만이 아니라 북한 인민 전체가 북한 정권의 인간 방패가 돼 있다. 북 정권은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대포밥' 정도로 여기고 있다. 그 대포밥에 불과한 북한 군인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정신적 노예가 돼 있다. 분하고 답답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김일성 일가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고 '죽을 위치'에 서 있음을 자랑하고 있다.
김일성 일족에 의해 쇠뇌되고 훈련된 북한주민은 김일성일가의 정신적 노예이며 김일성민족의 전사로써 북한 인민 전체가 북한 정권의 인간 방패가 돼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서운 적을 우리는 한민족의 평화통일과 동족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상대의 실체와 진실을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이다.
지난 십년간 대중선생과 놈현의 햇볕을 잔뜩 뒤집어쓴 김정은이 오늘날 그 빛을 발하는 것을 보면 좌익정권 십년동안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아전인수격이였던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2013-04-18 2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