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스님 이야기 1
허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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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달마’는 어떤 의미일까요? 1,500여년이라는 세월 저편의 인물이, 디지털로 상징되는 이 시대의 삶에 끼어들 여지가 있기나 한 것일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 앞서, 이른바 ‘달마 신드롬’이라 부를만한 일련의 현상들, 이를테면 집안에 달마도를 걸어두면 수맥이 차단된다고 믿는 현상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과학적’인 태도라고 타박할 일이 아니라 그러한 믿음의 바탕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달마는 바로 희망의 상징입니다.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희구하는 인간들의 근원적인 원(願)의 표상이 바로 달마인 것입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도 그것이며, 오늘 우리가 달마를 얘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렇듯 달마는 우리 삶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달마는 선불교의 초조라는 사실말고는 다분히 신비적이거나 전설적인 모습입니다. 따라서 ‘현대불교’에서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달마와 비실존적 인물로서의 달마라는 양면에 걸쳐 달마의 생애와 가르침을 조명해 나갈 것입니다.
앞으로 독자 여러분들을 달마 곁으로 이끌 필자 이규행 씨는 1935년에 충남 공주에서 나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왔습니다. 1960년 <조선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을 거쳐 1981년~1991년까지 <한국경제신문> 사장, 1991년~1995년까지 <문화일보> 사장과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현재는 <중앙일보>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현묘학회를 이끌며 수행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달마선법 참모습 널리 알리고 싶다”
달마 찾아 무수히 헤맨끝에 동방선종의 초조 만났다
이제 소설로 나마 그의 깨달음 풀어본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를 깊이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다. 더군다나 높은 경지에 이른 스님처럼 어떤 깨달음을 얻은 처지도 아니다. 그저 글을 즐겨 쓰는 한 사람의 언론인일 따름이다.
다만 인연이 있어 달마를 찾아 무수히 헤맸다. 마침내 환영 속에서나마 그 옷깃의 바람소리를 알아 차렸다. 그리고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것이 내가 달마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의 한 가닥이다.
흔히 달마의 한자표기는 두 갈래로 쓰인다. 達摩와 達磨가 그것이다. 앞의 마(摩)라는 글자는 ‘연마한다’는 뜻이고, 뒤의 마(磨)는 ‘숫돌에 갈다’는 뜻이다. 그러나 두 글자의 근본적인 뜻은 ‘갈다’는 점에서 같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앞의 ‘마’는 손(手)으로 ‘갈다’는 뜻이고, 뒤의 ‘마’는 돌(石)로 ‘갈다’는 정도이다. 어쨌거나 ‘갈다’는 행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을 터이다.
물론 손과 돌은 전혀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손과 돌이 별개가 아니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때부터 비로소 ‘참’의 세계에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의 우리가 ‘달마’라 부르는 이름은 범어 보디 다르마(Bodhi Dharma)의 한자 음역을 우리식으로 적은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두 가지의 한자 표기를 모두 쓰고 있다. 오히려 돌(石)을 가는 마(磨)자가 널리 쓰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어쩌면 일본 불교의 영향일는지도 모른다. 일본말사전에 보면 어김없이 달마 곧 達磨로 쓰여 있다. 일본말사전이 그처럼 고집해서 쓰는 까닭을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달마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풀이에 따르면 어떤 ‘마’자를 쓰느냐의 문제는 결국 달마관(觀)과 연관된다. 다시 말해서 달마에서 마(摩)를 쓰는 쪽은 달마를 역사적인 실존인물로 인식하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서 마(磨)를 쓰는 쪽은 비실존적인 신비스런 존재로서 달마를 내세운다.
우리나라 역대 고승들의 글을 보면 달마에서 마(磨)자를 쓴 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있다면 일제강점기 이후의 일이었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선맥의 굴곡을 나타내는 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나는 어떤 한 글자가 지니는 뜻의 크기가 작게는 미세한 먼지보다도 작고, 크게는 전 우주를 뒤덮을 정도로 크다고 여긴다. 또한 전혀 다른 세계일지라도 하나의 글자로 나타내고 넘나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마’라는 글자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중시한다. 그것은 그대로 수행 또는 마음자리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달마에 대한 이야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뿐만 아니라 다양하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단편적인 것에서 그친다. 일관되고 체계있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이른바 소설의 경우일지라도 예외라고 할 수 없다. 일반독자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나아가 달마의 진수(眞髓)를 알 수 있는 것의 하나가 소설일 터인데 우리 주변에선 그것조차 찾기 힘들다.
달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의 원형은 명(明)나라 때 청계도인(淸溪道人)이 지은 달마조사전(達摩祖師傳)이 손꼽힌다. 이 소설은 달마가 동토(東土)로 건너오기 이전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양무제(梁武帝)를 만난 것이라던가 소림사(小林寺)에서의 행적은 끝머리에 약간 다루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소설의 구성은 당시의 관심사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의 전개를 청계도인의 그것에 의존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련자의 처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과 균형을 유지하면서 달마의 생애와 깨달음의 세계를 그려보고자 한다.
달마가 출생한 남인도 지방은 우연하게도 가락국의 허황후가 태어난 곳과 같은 지역이다. 구태여 우연이란 말을 썼지만 나는 마음 속으로 우연이 아니라고 믿는다.
남인도 지방의 말과 뜻은 우리말의 그것과 유사하거나 공통적인 것이 많다고 한다. 나는 언어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예증이나 논거를 펼칠 입장이 아니다. 하지만 말에 공통요소가 있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점을 시사해 준다. 하나는 문화의 공유성이 고 또 하나는 뿌리의 공유성이다.
달마는 스승인 반야다라(般若多羅)의 가르침에 따라 동토로 왔고 오늘날 중국의 광주성에 도착했다. 반야다라는 서천(西天) 27대조이고 달마는 28대조라고 일컬어진다. 반야다라는 달마에게 이르기를 “동녘에서 받아온 하나(一)의 진법(眞法)을 다시 동토로 회귀시키라”고 했다. 그 ‘하나’의 진법은 물론 만교귀일(萬敎歸一)의 그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하나가 천부경(天符經)에서 일컫는 하나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반야다라는 이른바 독경(讀經)을 하지 않은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간경(看經) 즉 경전을 보는 것은 독경 즉 경전을 읽는 것만 못하고, 독경은 전경(轉經) 즉 경전을 굴리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경전을 읽는 것과 굴리는 것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르다. 읽는다는 것은 글자와 말뜻을 읽고 키우는 것인데 비해서 굴리는 것은 읽는 것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경전을 단순한 읽기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행(行)까지도 일치시키는 것이 바로 전경이다. 따라서 언행의 일치가 이루어지면 바로 전경이고, 그 사람은 한권의 경전 그 자체가 되는 셈이다.
보리다라는 전경을 일러 “숨을 내쉴 때 뭇 인연에 간섭받지 않고 숨을 들이쉴 때 오음(五陰)과 십팔계(十八界)에 있지 않으니 백천만억권(百千萬億卷)의 경전을 굴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훗날 달마의 이른바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의 근원을 이룬다. 달마가 이입(二入) 즉 이입(理入)과 행입(行入) 나아가서 사행(四行)을 말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별개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누어 생각하면 할수록 진법과 거리가 멀어진다. 진법은 오직 하나이고 이입의 일치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달마는 심지어 흰 것은 종이이고 검은 것은 글자일 뿐이라고 했다. 이것은 신광(神光)이 경전을 보고 깨달았다고 말한데 대한 대답이었다. 달마는 종이 위에 떡을 그려 놓고 그것을 먹어 보라고 신광에게 내밀었다. 경전을 보고 깨달았으니 그 떡도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광은 농락당한 분풀이로 달마를 내리쳤다. 그 신광이 바로 혜가(慧可)이다.
자기의 잘못을 깨달은 신광은 소림사 뒷산의 석굴에 은거한 달마를 찾아갔다. 잘못을 빌고 자기의 왼쪽 어깨를 계도(戒刀)로 베어버렸다. 신광의 법기(法器)를 일찍부터 알아차린 달마는 신광을 거두었다. 혜가라는 법명을 주고 법통을 잇게 한 것이다. 이것은 유명한 고사(古事)이다. 한데 정작 달마가 9년 동안 면벽(面壁)했던 석굴의 정체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 이 석굴은 ‘달마동굴’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동굴의 본래 이름은 ‘치우(蚩尤)동굴’이었다. 그 옛날 치우 황제가 수행했던 동굴이라는 이야기다. 달마가 치우동굴을 찾았을 때는 잡목과 흙더미로 가리워져 있어 아무도 몰랐다. 그곳을 달마가 찾아내 면벽수행하며 아홉해란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동토에서 시발한 하나의 진법과 치우 황제의 진법은 결국 하나인 것이다. 그곳에 달마가 좌정하여 동방선종의 초조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달마의 일생은 비록 파란만장했지만 그의 진법은 단순명쾌한 것이 특징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결코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이 달마의 가르침이다. 소설 달마에선 이야기가 복잡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이른바 달마선법의 참모습을 알리고 싶은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달마는 이른바 ‘부활(復活)’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달마의 주검은 웅이산(熊耳山) 기슭에 묻혔다. 그러나 무덤에는 짚신 한짝만 남았고 본래의 몸은 되살아났다. 이것이 지니는 종교적 의미는 엄청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달마는 생사불이(生死不二)의 경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수행자에 주는 의미는 과소평가되거나 간과돼서는 안된다.
내가 소설 형식을 빌려 달마이야기를 쓰는 참뜻은 바로 달마의 새로운 부활론을 엮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의 달마이야기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 터이다. 시공(時空)을 초월해 하나(一)의 진법을 펼치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달마이야기의 삽화는 내가 소장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달마 그림과 조각들을 사진에 담아 대신할까 한다. 나는 이 그림과 조각 하나하나를 범상스런 것으로 보지 않는다.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도 무엇인가 와 닿는 것이 있으리라고 믿어 마지않는다.
☞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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