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스님 이야기 2
허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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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천축 향지국의 셋째 왕자가 궁을 떠났다
키가 팔척이 넘는 보리다라 천상사에 머문지 두해째
이른 새벽 검무수련 몰두 몸에선 예지의 禪韻이…
◇셋째 왕자의 잠적
달마(達摩)대사의 본래 이름은 보리다라(菩提多羅). 오늘날의 남인도 즉 남천축(南天竺) 향지국(香至
國)의 셋째 왕자로 태어났다.
어느 날 향지국의 궁성 안에서는 나라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의 놀랄만한 소식이 은밀하고 급속하게 퍼
지기 시작했다. ‘셋째 왕자가 깜쪽같이 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셋째 왕자를 모시던 내관과 시녀들은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왕자 곁에서 시중을 들었는데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으니 이만저만 걱정이 아
닐 수 없었다. 게다가 보리다라 왕자는 왕과 왕후가 가장 기대를 걸었던 존재가 아니던가. 비록 셋째이
긴 했지만 나라 안팎에선 이미 유일한 희망이요 후계자라는 소리를 들어온 지 오래였다. 그만치 보리다
라 왕자는 출중했다. 숭고함과 존귀함 그리고 뛰어난 재능은 누구도 감히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을 정
도였다.
한데 국왕은 뜻밖에도 셋째 왕자가 떠나 간 일에 대해서 추궁하지 않았다. 전혀 화를 내지도 않았다.
담담하게 현실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국왕은 이미 그럴 가능성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리다라는 타고난 본성이 무엇에 매이기를 싫어했다. 산천에 노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품은 그의 형들
과 전혀 달랐다. 그는 사치스러움을 부끄럽게 여기고 탐욕을 사갈(蛇蝎)처럼 싫어했다.
어려서부터도 부(富)와 귀(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제왕학(帝王學)을 닦으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늘 골똘히 생각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첫째 부조리(不條理)를 타파하여
중생들이 편안하게 잘 살도록 하는 것이고, 둘째 무공(武功)을 연마하여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
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보리다라는 오래 전에 이런 견해를 부왕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 왕은 셋째 왕자
의 생각이 마치 자기의 속마음을 꿰뚫은 듯 싶어 흡족해 했다. 국왕 자신도 바로 그 두 가지 점에 중점
을 두어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여 나라의 기반을 공고히 했고 나아가서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
도록 힘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셋째 왕자의 잠적 사건을 불문에 붙이면서 두 가지 지시를 내렸다. 하나는 보리다라의 행적을 찾되그의
행동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 또 하나는 어느 곳에 있는지 알면 그에게 금은보화를 좀 보내서 생활에 아
무런 불편이 없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왕의 참뜻이 전해지자 궁 안의 사람들 모두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몰래 왕궁을 떠나온 보리다라는 명산을 두루 돌면서 자연 속에 몸을 던졌다.
오래된 절은 하나도 빠뜨리지않고 찾아 다녔다. 학덕이 높은 스님에겐 경전의 뜻을 물었고 무도에 능한
스승을 만나면 연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 곳 천상산(天象山)에 자리한 천상사에 머문 지도 벌써 두 해가 지났다.
보리다라는 항상 해 오던 대로 새벽 수련에 열중했다. 어슴푸레한 새벽 안개 속에 감싸여 있는 천상산
자락은 신비한 기운 마저 감돈다. 아직 새도 울지 않고 벌레도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 맑고 서늘한
바람이 절 앞의 천상석(天象石)을 어루만진다. 천상석은 마치 살아 있는 코끼리처럼 귀, 코, 눈, 꼬리,
발이 뚜렷했다. 왜 천상산이란 산 이름이나 천상사라는 절 이름이 비롯되었는지를 짐작케해주는 그런
석상이었다.
보리다라는 천하를 두루 다녀 보았지만 대자연과 사찰과 석상이 이처럼 신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은 일
찍이 본 일이 없었다. 키가 팔척이 넘는 보리다라는 천상석을 맴돌면서 검무(劍舞) 수련을 시작했다. 그
의 몸에선 비범한 예지의 신운(神韻)이 풍겼다.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손에 잡고 움직이는 품세는 이미
어떤 경지를 넘은 듯 싶었다. 때로는 태풍이 나무를 흔들 듯 칼바람이 일고, 때로는 가랑비처럼 잔잔하
게 춤을 추었다. 고요하게 서 있을 땐 바위 같았고 뛰어오르면 마치 승천하는 용인 듯 했다.
수련을 시작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어슴푸레하던 동쪽 하늘이 훤하게 밝아 온다. 숲 속의 새들도 보금
자리에서 깨어났는지 푸드득 날개 소리와 함께 지저귀기 시작했다. 칼을 거둔 왕자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는 천상석 위로 뛰어올라가서 잠시 쉬고 싶었다. 천상석은 사람 키보다도 몇 길이나 높았다.
가파르기는 마치 절벽 같았다. 보통 재주론 결코 미칠 수 없는 그런 높이에 코끼리 상이 우뚝 솟아 있었다.
보리다라는 두 손을 힘차게 뿌리치며 훌쩍 몸을 날렸다.
구름을 밟고 바람을 타는 비술(秘術)로 높이 사뿐히 날아올라 천상석의 등마루에 가볍게 내려섰다.
바로 그때 석상 아래에서 은방울 같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대단한 솜씨예요! 정말 대단해요….”
보리다라는 몸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낯익은 얼굴의 여인이 위를 올려다보면서 향긋한 미소를
뿜고 있었다. 순간 보리다라는 할 말을 잊었다. 여인의 흰 비단 치맛자락은 천의(天衣)인 양 하늘거렸
고, 초생달 같은 눈매에 발그레한 뺨은 옥으로 빚은 듯했다. 그녀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조
용한 목소리로 보리다라를 향해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사형! 일찍 일어 나셨네요? 수련하셨나 보죠.” 보리다라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이 빨개
지고 말았다. 이 여인으로 말하자면 보리다라와 한 스승 밑에서 무술을 배우는 사매(師妹) 막의(莫依)
였다. 그는 막의가 웃음을 보내는 속뜻을 알았다. 그는 구름을 밟고 바람을 타는 비술을 부린 것을 후회
했다. 그런 비술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보리다라가 지닌 원래의 공력만으로도 천상석에 날아오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보리다라는
단지 수련의 피로를 덜기 위해 비술을 썼을 뿐이다. 하지만 선문(禪門)의 수련에서는 그런 편법을 절대
로 허용하지 않았다. 보리다라는 할 말이 없었다. 몸을 돌려 천상석 위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두 손을 합장하고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호흡을 조용히 가다듬으며 좌선을 시작했다.
막의의 웃음소리가 뚝 멈췄다. 그러나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순간, 보리다라의 귓가에 한줄기 바람 기
운이 스친다. 살짝 눈을 떠보니 막의가 눈앞에 내려앉는 참이었다. 총기어린 눈동자를 굴리면서 막의는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보리다라는 온 몸이 달아올랐다. 또 한번의 실수를 뼈아
프게 후회했다. 본래 좌선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데도 사매 앞에서 짐짓 좌선하는 척 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을 것인가.
본래 좌선은 고요히 관(觀)하는 것이다.
관이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내면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고요함은 선천적인
지혜에 접근하는 온상이라고 일컬어진다. 지혜는 고요함의 궁극에서 나타나는 얼빛이다. 그러므로 불
가의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도 고요함 즉 선정(禪定)을 중심으로 반야를 이루어가는 닦음인
것이다.
일찍이 노자(老子)는 비어 있음을 철저히 정관(靜觀)하고, 고요함을 착실하게 지키면 만물이 함께 번성
하되 그 돌아감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본래의 자리 곧 뿌리로 돌아옴을 일컬어 존재의 운명으로 돌아감
이라고 했다. 존재의 운명으로 돌아감을 일컬어 실재라고 했고, 실재를 아는 것을 일러 깨달은 밝음이
라고 했다. 증자(曾子)는 대학(大學)을 저술할 때 이 점을 보다 명백히 밝혔다.
그치는 것(止)을 안 다음에야 정(定)이 있고, 정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고요함이 있고, 고요함 다음에 편
안함이 있고, 편안함에 이어 깊은 생각이 이루어지고, 그런 생각의 연후에야 능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
다고 했다. 이런 견해는 한마디로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
의 법칙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좌선하는 데 있어서도 이런 법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만약 조금이라도 고요함이 흔들린다면 수련자의 생각은 헷갈리기 십상이고 마음은 어지러워지게 마련
이다. 이런 상태에선 참된 수련이란 불가능하다. 보리다라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막의의 얼굴에 나타난 웃음은 한순간에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에서 그는 은근히 모
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외면하기 힘든 야릇한 기운이 있었다. 비록 열 여덟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사매지만 보리다라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엄격했다.
그의 결점을 서슴없이 들춰내는가 하면 어떤 일에서도 양보는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벌떡 일어서서 막의를 향해 정중하게 합장의 예를 했다.
“사매의 가르침에 감사를 드리오!”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하면서도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소한 실수에 지나지 않은 걸 가지고 괜한 트집을 잡은 것 같군요. 용서해 주세요, 사형.”그래도 보리
다라는 여전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손발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몰랐다. 눈치 빠른 막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만한 일로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엔 지금 사형께서 할 일은 휴식인 것 같아요. 어서 절로
돌아가세요.”사매의 말투는 늘 이랬다. 탈이라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 담백한 것이었다. 보리다
라는 이런 막의의 진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화살이 되어 그의 가슴에 박혔다.
“사형, 내일 아침에 우리 함께 수련하는 게 어때요?”
“…”
보리다라는 된다 안 된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에 씁쓸한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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