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인 무진장(사진) 스님이 9일 오전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입적했다.
세수 82세, 법랍 58년. 1956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태국·일본 등에서 남방불교·천태교학을 접한 후 서울 조계사에서 수행과 포교에 힘썼다.
제2대·4대 포교원장을 맡았다. 사찰과 돈, 승용차 등 고가품 7가지가 없다고 해서 ‘칠무
스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원로회의장으로 치러지며 다비 및 영결식은 13일 오후 4시
범어사에서 열린다. 02-768-8563.
번뇌가 탁한 말법시대에 청정하게 수행하다 입적하신 스님께 귀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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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2013-09-10 08:10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 마련된 혜명당 무진장대종사 분향소.
조계종 원로의원 혜명당 무진장 대종사가 오늘(9월9일) 오전4시30분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입적한 가운데, 대종사를 추모하는 조문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서울 조계사(주지 도문스님)와 문도 스님들은 오늘 오후 조계사 대웅전에 분향소를 마련하고 조문객을 받고 있다.
또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수불스님) 보제루에도 분향소가 설치돼 현재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무진장 대종사의 영결식와 다비식은 금정총림 범어사에서 원로회의장으로 오는 13일 오후4시 봉행된다.
1932년 제주에서 태어난 무진장 대종사는 1956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며, 1960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무진장 대종사는 1971년부터 조계사에 주석하며 40여년 간 수행과 포교에 정진했다.
제2대, 4대 조계종 포교원장을 역임했으며, 2007년 12월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으로 추대됐으며, 2008년 대종사 범계를 품수받았다.
제주도가 고향인 무진장스님은 1932년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열일곱 살 때 학도의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는데 스물한 살에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상심해 있던 스님에게 집안 친척 가운데 태고종 소속 스님이 출가를 권유했다.
종가집 장손이었던 스님은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출가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곤 했다. 출가를 결심한 스님은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범어사 동산스님과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게 된다.
범어사에서 십년 가까이 행자생활을 한 스님은 ‘부처님의 지혜를 이어받는 자’라는 뜻의 혜명(慧命)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 때가 1960년이다. 계를 받던 날도 나무를 하러 갔는데 빨리 내려오라는 행자의 말을 듣고 큰 환희심에 차 “그 높은 산에서 어떻게 내려왔는지, 굴러서 왔는지…”라고 회상했다.
이후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을 이수한 스님은 1960년대부터 1970년도까지 교학공부에 전력을 다했다. 동국대 불교대학과 대학원을 수료하고 태국으로 떠나 1968년까지 방콕 왓 벤타마보핏 사원에서 남방불교를 연구했다. 일본 경도대학 대학원에서 천태교학을 공부했다.
학창시절 대강백으로 이름 높은 우룡스님과 고산스님도 같이 공부했으며, 일본 유학 때는 홍윤식 박사와 인환스님과 함께 어렵게 공부를 했다. 당시 대원정사 장경호 거사와 민기식 씨 등에게 학비를 도움받기도 했다.
무진장스님은 1971년부터 서울 종로의 중심 조계사에 주석하며 40여 년 간 불교 발전과 대중포교에 헌신했다. 저자에 머무르면서도 어떤 수행자보다도 더 철저한 수행자의 길을 걸었다. 탑골공원에서 걸인들을 상대로 매일 법문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스님이 공원에서 매일 대중법문을 한다는 소식에 도선사 청담스님이 당시 돈으로 매일 200원을 후원했다. 20여명을 먹일 수 있는 밥값이라고 한다.
무진장스님은 법문을 요청하는 곳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다녔다. 그래서 불자라면 누구나 법문을 들어봤을 만큼 설법과 포교에서는 손꼽히는 스승이다. 근검절약을 강조했던 동산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일체의 주지 직을 사양하고 포교에만 전념해 왔다. 그 공로로 지난 2005년 불교의 대중화 생활화 현대화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제3회 대원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무진장스님은 평생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자, 목도리, 내복, 절, 돈, 장갑, 솜옷 등 일곱 가지가 없는 스님으로도 한 신문에 소개된 바 있다. 승용차나 고가품도 일절 없었다. 대종사 품계를 받던 날도 재가불자의 봉고차를 타고 해인사까지 내려갔다.
평소 스님은 참된 부처(眞佛)는 마음속에 있으니 자신이 본래 청정한 법신인 진불임을 깨닫고 수행정진 할 것을 당부했다.
“우리 마음에서 직심(直心)이 곧 보살정토입니다. 모든 국민이 직심을 지니고 있으면 그 나라가 바로 극락정토 입니다. 견성(見性)하지 않고서는 직심을 모릅니다. 견성은 큰 깨달음이 아닙니다. 처음 불교를 믿기 위해 첫발을 내딛는 것 자체가 견성입니다. 불교는 인간적 자기탐구의 종교입니다. 밖을 향해 구하는 외도(外道)가 아닙니다. 쉼 없이 탐구해 근원적인 자기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스님은 또 항상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점검해보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처님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가장 평범한. 보통’ 사람입니다. ‘가장 평범하고 보통 사람인’ 부처님 성품을 닮기 위해 우리는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 앞에서 무엇을 빌고 있습니까? 아파트 당첨을, 남편 승진을,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붙기를 바라고 있지 않나요? 왜 절에 다닙니까? 우리의 정신세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 다니는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출처: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28376) 2013-09-11 0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