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도량 운문사 주지 일진스님 인터뷰.-지금 이순간 잘 살자!!!
강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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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주지 일진스님 인터뷰
“지금 이순간 잘 살자!”
일진스님의 미소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십사 년 전 인터뷰 때보다 더 깊어지고 여유로워졌다고 할까. 당시 운문사 승가대학 강사로 있었던 스님은 학감을 거쳐 3년 전 주지로 취임했다. 7월 초, 오전 9시, 운문사 학인들이 공부 삼매에 든 경내를 둘러보고 나서 밀짚모자를 손에 든 채 나타난 스님을 종무소에서 만났다.
주지는 받는 사람이 아닌 주는 사람 “스무 살에 운문사에 들어와 40년 만에 주지로 취임했다. 주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운문사는 ‘세속오계’를 전한 원광국사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선사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천년 도량이며,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개설된 비구니전문 강원이 1985년 운문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교육과 경전연구기관으로 1800여 명의 수행자를 배출했다.
“주지는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혹 공부 시간에 졸고 있는 학인을 보면 공부할 시간에 왜 졸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저 어린 나이에 여기에 와서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낸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장한가, 그리고 건강하니까 졸린 거다 하는 마음이 든다. 잠시 재워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주지다. 주고 싶은 마음이 어른 마음 아닌가.”
“운문사는 현재 150여 명이 상주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교육기관이다. 책임감이 남다르지 않을까?”
“출가자는 모두 부처님의 흉내를 내고 사는 것처럼, 지금 회주로 계시는 명성스님을 오래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보고 배운 바대로 하면 된다는 생각이어서 큰 부담은 없다. 잘하던 못하던 책임은 주지에게 있지만 평소대로 살면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운문사라는 비구니교단 안에서 은혜를 입으면서 살았으니까 대내외적으로 봉사를 많이 하고 심부름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어린이 수계법회에서의 일진스님.
"7월 6일에는 논산에 있는 육군훈련소 호국연무사 군법당 수계법회에 갑니다," 하시더니, 3200명 훈련병에게 명성회주스님께서 수계해 주셨고 일진주지스님, 대학원생스님, 화엄반스님들이 다녀왔다고 한다. 장병의 손을 잡고 앉아계신 분이 일진스님.
일진스님은 스물여덟에 운문사승가대학에서 처음 강의를 하기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명성스님에게 전강을 받았다. 한국불교사에서 비구니가 비구에게 전강을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전국비구니회장을 지내실 만큼 비구니계에 끼친 영향력이 큰 명성스님은 어떤 어른인가?”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부처님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한다. 솔직 담백함과 천진함을 가지고 계시다. 운문사를 졸업한 학인이 1800여 명이니 얼마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거쳐 갔겠나. 그런데 아무리 모난 사람도 스님의 품안에 들면 모두 둥그러진다. 소임자 입장에서는 공사가 분명하고 시간을 아끼시고 정해진 규칙을 반드시 지키는 것을 배웠다. 지금 여든이 넘으셔서 모든 소임을 놓고 자유롭게 사셔도 흐트러짐이 없으시다. 규칙을 엄격하게 지켰을 때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배운다.”
“봉녕사 묘엄스님, 명성스님 등 뛰어난 강백을 이은 차세대 강백인데, 본인은 후학들에게 어떤 스승인가?”
“얼마 전 한 학인스님이 시자로 살다 나가면서 ”강의실에서나 법당, 그리고 주지실에서 똑같은 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배운 게 많았고, 의기소침해 있는 제에게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행복했다“는 편지를 남겼다.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행복했고 출가자로서 자긍심을 가졌다면 스승으로서 성공한 것 아닌가.”
불가에서 여성은 열등한 존재인가 스님은 불교여성개발원이 출범할 때 후원금을 내놓으면서 특별자문위원을 맡았을 만큼 여성 불교에 관심이 많다. 또 대학에서 ‘불교와 여성’ 강의를 오랜 동안 해오고 있다.
“여성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기도를 하고 신심이 충만한 채 내려오다가, 대여섯 분의 비구 스님들이 올라가면서 ‘백 년을 해봐라, 여자가 해봤자…’라는 말을 하더라. 그때 큰 충격을 받고 ‘여자는 수행을 해도 안 되는가’ 하는 고민을 가지게 되었다. 학교로 돌아와 부처님은 여성을 어떻게 출가시켰고, 당시 교단 사정을 어떠했을까 하는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했다.”
“당시 ‘불가에서 여성은 열등한가’ 라는 시사 논문을 발표했다. 결론이 궁금하다.”
“누구를 비난하거나 투쟁적이지 못한 성격이라서 늘 화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편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불법승 삼보이고, 승가는 비구, 비구니 출가 2부승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므로 비구, 비구니는 승가의 양쪽 날개다. 당연히 함께 날아야 발전이 있는 것 아닌가. 남성과 여성의 문제는 우등과 열등에 있는 게 아니고 특징에 있다. 강한 것은 남성의 특징이고, 부드럽고 섬세한 것은 여성의 특징이다. 양쪽의 특징을 살려서 조화를 이룰 때 제대로 된 수행이 되는 것이지, 우열의 관계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은 불교적인 사고가 아니다. 진리를 이해한다면 여성, 남성을 분별할 것이 있는가.”
“반응은 어땠나?”
“논문을 근거로 책상 앞에서 쓴 것이 아니고 비구니 노스님들을 찾아뵈면서 스님들은 어떤 마음으로 수행을 하는가에 대해 여쭤봤다. 물론 비구스님들도 찾아뵈었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을 뒷바라지 한 일이라던가 인경사업, 관등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분들도 비구니스님들이었다. 불교를 지금까지 이끌어온 데에는 여성의 힘이 컸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난 6월, 194회 종회에서 ‘종헌종법개정안을 폭넓게 다루는 가운데 호계위원의 자격을 ’승려‘로 개정해 비구니스님들의 진출을 가능하도록 한 개정안이 표 대결에서 부결되자, 비구니 종회의원 10명 전원이 퇴장하는 사태가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승가에서의 남녀평등 문제는 발전이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가 1700년이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하지 않겠나. 이번 종회에서의 일도 발전적인 쪽으로 가는 변화라고 본다.”
“비구니종회의원으로 그날 현장에 있지 않았나? 비구니 호계위원의 자격건은 어떤 방향으로 가닥지어질 것으로 보는가?”
“바뀌어 질 것이다. 비구니가 비구를 갈마하는 것이 아니고 비구니는 비구니가 보살필 수 있도록 장치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방안인데, 안 되겠는가. 비구든 비구니이든 참선수행, 강의, 포교 등 각자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보살행을 하며 자기 역할을 다할 때 위상이 올라가고 자리가 확보된다고 생각한다.”
“부처님께서는 정작 여성 불교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궁금하다.”
“출가한 비구, 비구니는 10계와 260계, 348계를 지니고 산다. 여성은 업이 두터워서 비구보다 계가 많은가 하는 시각도 있어왔으나 사실은 부처님께서 여성의 신체적, 감성적 부분까지 조목조목 세밀하게 배려한 것이라고 본다.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선언한 분께서 성차별을 하셨겠는가.”
어머니의 힘, 여성의 힘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신행생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게 사실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고 가정생활을 주도하는 등 영향력이 대단하다. 바람직한 신행생활은 어떤 걸까?”
“어느 종교든 여성의 숫자가 많은 게 사실이다. 여성 불자들을 가장 많이 만나는 우리 비구니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많이 생각한다. 나는 주로 경전을 강의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머니들에게 독립적인 인생을 살라고 권한다. ‘나는 너의 무엇이다’라는 집착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누구의 무엇이 아닌 개인의 인격으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할 때 가족 구성원들도 행복한 것이다. 자식도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순간까지는 정성을 다해 완전히 독립할 수 있도록 정성을 쏟고 그 다음엔 놓아야 한다. 각 개인이 독립적일 때 서로 존경할 수 있다.”
“특별히 여성들에게 권장하는 경전이 있나?”
“여성들에게는〈승만경〉을, 남성들에게는〈유마경〉을 필독서로 권장한다.〈승만경〉은 재가 여성인 승만부인이 부처님께 성불할 수 있다는 수기를 받고 승만부인이 설주가 된 경전으로, 남녀가 차별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경전이다. 파사익왕의 부인이자 승만부인의 어머니가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서 ‘착하고 심성이 고운 나의 딸이 이 자리에서 부처님 법문을 함께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그 모습이 참 부러웠다. 모녀가 함께 하는 수행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남성들에게〈유마경〉을 권하는 이유는?”
“보살은 마음을 취하고 범부는 경계를 취한다고 했다.〈유마경〉은 경계에 매이지 않는 것을 설하는 취고의 경전이다.”
“스님의 어머니께선 세 따님을 출가시키셨다고 들었다. 불심이 누구보다 강하셨을 텐데, 어머니의 신심이 궁금하다.”
“기복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모든 것을 초월한 완벽한 신앙심을 가진 분의 표본이셨다. 어머니에게 관세음보살님은 각박하고 힘든 세상일을 해결해주는 분이라는 믿음만 있었다. 역사성과 이론이 없는 맹신일 수도 있지만 나는 우리 어머니처럼 맹목적인 신앙심이 없으면 수행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십대의 서양 수행자들이 운문사를 방문했을 때 북대암을 올라가다가 바위에 대고 절을 하더라. 바위에 절을 할 수 있는 맹목적인 신앙심이 없으면 어떻게 한국스님을 의지해 출가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가 마흔의 늦은 나이에 나를 낳으셨는데 얼마나 약골인지 서른을 못 넘길 거라고 했다. 나의 출가와 출가생활엔 늘 어머니가 계셨다.”
“세 따님을 출가수행자로 둔 어머니의 인생이 궁금하다.”
“어머닌 16세에 결혼해서 89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오로지 현모양처로 일생을 마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농사를 지으시면서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는 수발을 다 하셨는데 동갑내기이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에 가야겠다’고 하시면서 곡기를 끊으셨다. 언니 스님들이 ‘어머니 지금 가시면 눈이 많이 쌓이고 추워서 자손들이 고생하니까 봄에 가세요.‘ 하고 말씀드리자 ’어디 그게 맘대로 되나요?‘ 하시더니, 언니 스님들과 함께 한 철 안거를 나시고 추운 겨울이 지나 개나리가 활짝 피어날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님을 깨우쳐주신 나의 스승이셨다.“
“10년 전, 불교여성개발원이 출범할 때 격려해주시고 큰 힘을 실어주셨다고 들었다. 덕담을 해주신다면?”
“여성 불자님들은 불교의 희망이고 든든한 울타리이다. 누구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려면 무엇보다 실력이 있어야 한다. 단체 속에서도 개인의 실력을 키우길 바란다. 넉넉한 힘은 자기 수행과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두 시간 남짓의 인터뷰 시간 동안 스님은 시종여일 미소를 잃지 않았고, 말씀하시는 것도 물 흐르듯 유연하고 걸림이 없었다.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스님께 좌우명을 물었더니 1초도 망설임 없이 나온 답은 이랬다.
“지금 이 순간 잘 살자! 행복하자!”
일진스님은 1970년 재석스님은 은사로 득도, 다음해 벽안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78년 운문승가대학과 동국대 승가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현 운문사승가대학장 명성스님에게 전강을 받고 운문승가대학 강사로 취임했다. 1988년 대만불학연구소에서 중국불교를 연구하고, 1994년 일본 경도불교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조계종 교재편찬위원, 단일계단 갈마위원, 불교여성개발원 특별자문위원,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운문사승가대 강사, 운문사 주지로 있다.
-계간 우바이 예찬 여름호에서 박원자(승진행) 취재
운문사의 여름 풍경(운문사 홈피에서 퍼옴) 오전엔 방문했을 때는 수업중이어서 절 전체가 삼매에 든 듯 조용했는데, 점심 때가 되자 이제 막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한 듯한 파릇파릇 푸른 젊을 간직한 스님들이 식당에서 공양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 우리 불교가 참 희망적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3200명의 장병 앞에서 수계를 마치고 법문하시는 운문사 회주 명성스님. 비구니 스님들의 파워가 팍팍 느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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