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淸華) 스님! 흰구름에 얼굴을 파묻고 서 있는 청산(靑山)과도 같이, 신비롭고 신선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도인(道人)으로 알려져 있는 스님은, 곡성 동리산 태안사에 주석중이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도 그 비조격이었던 동리산 태안사는 곡성읍으로부터 30㎞를 더 달려야 하는 곳에 있었다. 구례쪽으로 흘러내리는 섬진강을 왼쪽으로 끼고, 오른쪽으로도 역시 구례쪽으로 달려가는 전라선 철도를 끼고 포장도로를 18㎞를 달려 압록역을 벗어나면, 서쪽에서 흘러온 보성강줄기가 섬진강과 만나는 곳에 이른다. 포장도로는 그대로 다리를 건너가도록 놔둔 채, 청법자(請法者)가 탄 차는 보성강 줄기를 따라 오른쪽으로 갈려난 비포장도로로 꺾어든다. 길은 가파른 산기슭 암벽을 깎아 1차선으로 어렵게 나있고, 보성강은 그 발 밑 저 아래로 흐른다. 차창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보성강물은 비취빛이다. 폭넓은 강류의 건너편 기슭에는 검은 빛을 띤 돌들이 물가에 엎드려 있는데, 조개를 캐는 것일까? 허리를 구부린 아낙네 두어 사람이 황새처럼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곳에는 은어가 많아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강을 덮을 정도 란다. 6㎞를 그렇게 달리면 길은 또 갈래난다. 청법자(請法者)가 탄 차는 왼 편으로 꺾어 다리를 건넌다. 새 다리는 시멘트로 된 태안교, 폭이 2차선으로 넓어져 있다. 다리를 건너면 도로도 2차선. "이 다리는 스님이 놓으셨지라우. 이 길도 스님이 내시고라우" 스님이란 청화(淸華) 스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택시 기사의 설명없이도 알 수 있다. 청화 스님이 곡성골에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다. 태안교로부터 태안사까지는 6.5㎞, 이 다리와 길이, 스님이 태안사에 주석한 후로 닦여진 것이다. 스님을 존경한 곡성 군수가 스님에게 바친 신심의 표현이었음은 절에 가서야 안 일-. 어느새 가을이 다 갔는지, 길 양 옆에는 잎마저 말라버린 코스모스 앙상한 줄기들이, 못다진 한 두송이 가냘은 꽃잎을 한들거리며 늦가을을 지키고 있다. "여기서부터 절로 들어가는 길입니다요" 개울을 끼고, 잡목과 측백나무, 전나무 등이 어우러진 숲 사이로 난길은, 하늘이 나뭇가지로 덮여져서 활엽수 잡목들의 물든 잎이 벌써 반쯤은 졌는데도, 그늘에 덮여 있다. "여기서부터 2.5킬로여라우" 향긋한 낙엽 냄새를 담뿍 담은 서늘한 산기(山氣)가 가슴 구석으로 깊이 파고 든다. 청법자(請法者)는 어머님이 계시는 고향에라도 돌아온 듯한 행복감에 젖는다. 조용한 물소리를 들으며 싱그러운 숲속으로, '반야교' 를 지나고 '해탈교' 를 지나 그렇게 한참을 가노라면 능파각(凌波閣)이란 크지 않은 현판을 이마에 걸고 서 있는 고건물이 개울의 양 언덕에 걸터서서 검푸레한 암반을 깎아 흐르는 물을 그 마루 밑으로 흘려 보내고 있다. 앞이 훤히 열린다. 태안사 건물들의 지붕이 높은 축대 위로 드러나 보인다. 황국이 노랗게 피어있는 선방(禪房) 앞뜰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밟아, 개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니, 조그만 토굴이 있다. 안내하는 선방의 선덕(禪德) 금산 스님이 문밖 뜰에 서서 방문을 신고한다. "스님 제가 왔습니다" 안에서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현관문이 열린다. 깡마른 몸에 안광이 번쩍이는 중키 정도의 늙수그레한 주인이 들어오라고 허락한다. 청법자는 두 평도 못 될것 같은 천정이 낮은 방안으로 안내 되어 3배를 드린다. 일배를 맞절로 받으신 스님은 청법자에게 일배만 하라고 말리신다. 기어이 3배를 마치고, 청화 스님의 빛을 쏘아내는 형안(炯眼)을 지켜보며 스님께 여쭈었다. 연기도리(緣起道理)를 깨달으라!
<기자> 스님, 원각경 보안보살장(圓覺經 普眼菩薩章)에, '선남자(善男子)야, 이 보살(菩薩)과 말세중생(末世衆生)이 여러 환(幻)을 증득(證得)하여 영상(影像)을 멸(滅)한 고로, 이때에 곧 모없이 청정함을 얻을 것이니 무변허공(無邊虛空)이 각소현발(覺所顯發)이니라, 각(覺)이 둥글고 밝은고로 나타나는 마음이 청정하며, 마음이 청정한 고로 보이는 것이 청정하며, 견(見)이 청정한 고로 안근(眼根)이 청정하며 근(根)이 둥글고 밝은 고로 나타나는 마음이 청정하며, 마음이 청정한 고로 보이는 것이 청정하며, 견(見)이 청정한 고로 안근(眼根)이 청정하며 근(根)이 청정한 고로 안식(眼識)이 청정하며....' 라고 말씀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중에 '무변허공 각소현발(無邊虛空 覺所顯發)' 이라는 부분이 예로부터 그 해석을 놓고 공부인(工夫人)들 사이에 이견(異見)이 있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님, 깨달으면 무변허공(無邊虛空)과 같은 경계가 나타난다는 뜻입니까? 그보다도 번뇌망상이 모두 잠자서, 환상이 없어지고, 주객(主客), 시공(時空)이 없어져 무변허공과 같이 되어지면, 산을 만나면 산이 되고, 물을 만나면 물이 된다는 뜻입니까? 무변허공이 각소에서 나타난다고만 하면, 그 앞의 변득무방청정(便得無方淸淨)이라는 말씀과 중복되지 않겠습니까? 스님께서 학인(學人)들의 미혹(迷惑)을 가려 주십시오. <큰스님> 지금 물으신대로 견해(見解)를 두 가지로 가질 것이 아니고 두 가지 견해를 하나로 해야 합니다. 깨달음 없이 무변허공과 같은 청정 한 경계를 얻을 수가 없는 것이지만 청정함 없이 깨달음이란 얻어질 수 없습니다. 현상계(現象界)가 모두 환(幻)임을 알고 모든 영상(影像)이 멸해 없어진 자리를 얻으면 그때그때 일어나는 경계가 모두 청정하지 않음이 없지요.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부처님께서 법성(法性)을 온전히 얻으시고 선정해탈(禪定解脫)을 하신 후에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해(解)로 알아볼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오(悟)의 경계에도 심천(深淺)에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혜해탈(慧解脫)에 머물 것이 아니고 구해탈(俱解脫)을 증득(證得)해야 합니다. 선정(禪定), 삼매(三昧)를 닦지 않고는 생사(生死)를 초탈하는 구해탈(俱解脫)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얻으면 그때에 화장세계(華藏世界)를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모두가 진리 아님이 없는 것을 중생이 어두워 보지 못할 뿐입니다. 진리가 그대로 우리 앞에 항상 전개되어 있습니다. <기자> 스님, 유마경 불이법문품에 보면, 삼십일명의 보살들이 저마다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견해를 말하고 나서, 보살들이 문수 보살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드는 것이냐" 고 묻습니다. 문수보살이 여러 보살들에게 대답하기를 '일체법(一切法)에 있어서 그것을 설(說)하는 것도 없고, 해설(言)하는 것도 없으며,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하는 것(示)도 없고 알음알이 내는 것(識)도 없어 모든문답을 떠나는 것을 보살이 불이법문에 드는 것이라고 한다' 고 말하고, 유마거사에게 묻기를 '무엇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하니 유마거사가 이때에 '묵연무언(?然無言)' 잠자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스님, 스님께서는 묵연무언(?然無言)하시지 마시고 보살이 불이법문에 드는 법(法)을 일러주십시오. <큰스님> 불이법문 아님이 없는데 새삼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어묵동정(語?動靜)에 어묵동정(語?動靜)이라 하면 그것이 곧 분별(分別)이지요. 불이법문은 분별을 떠나는 것입니다. <기자> 금강경(金剛經)에 말씀 하시기를 '선남자 선여인이 발아뇩다라 삼먁삼보리심일 땐 응여시주 여시항복기심(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이니라' 하였는데 '여시(如是)' 즉 '이와 같이' 는 어떻게 하라는 뜻의 말씀 이십니까. <큰스님> 제법(諸法)이 공(空)한 줄 알고 마음에 앙금을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허공과 같이 비고 걸림없는 자리에서 마음을 써야 합니다. 역시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기자> 우리 불자들이 모임을 갖거나 의식을 집행할 때, 빠짐없이 독송하는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고 말씀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색과 공이 동시적(同時的) 존재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색과 공을 동시에 성립시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큰스님> 그것은 중도(中道)이고 중정(中正)이겠지요. 바꾸어 말하면, 현상(現象)으로 보면 '색(色)' 이지만 실상(實相)으로 보면 '공(空)' 이라는 뜻입니다. 미루어 짐작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공 부 (工 夫) <기자> 스님, 이제 공부하는 방법에 대하여 여쭈겠습니다.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의 원시교단에서는 지관수행법(止觀修行法)외에 다른 공부법이 있지 않았습니다. 지관수행법에 대하여 잡아함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난타여, 마땅히 이법(二法)을 닦으라. 이법(二法)이란 지(止)와 관(觀)이니라' '비구여, 선(禪)을 닦는 데에는 안으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진(精進)하여 여실히 관할지니라' '수행자는 혹 먼저 적(寂:止)을 얻고 뒤에 관(觀)에 들어가기도 하며, 혹 먼저(觀)을 얻고 적(寂)에 들어가기도 하거니와, 선후에 관계없이 다 해탈(解脫)을 얻게 되느니라. 적(寂)이란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어지럽지 않으며, 방일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정법을 관찰하여 정법대로 보고 깨달음을 관(觀)이라고 하느니라'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지관수행에 관한 말씀은 많이 있겠습니다만, 이 지관수행법은 마음을 고요히 안정시키고, 진리를 관하는 것으로, '디아나(Dhyana)' 즉 선나(禪那)입니다. 그런데, 이 선(禪)이 중국에 들어가서 간화선(看話禪)으로 발달하고, 중국을 통해 선(禪)을 들여온 우리 나라는 지금 대부분의 선방이 간화선(看話禪)을 따르고 있습니다. 스님, 저도 화두(話頭)를 합니다만, 화두를 잘못하면 평생을 그르치게 됩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면 '홀연한 한 생각이 산하대지를 일으킨' 이후에 유무가 모두 병인 줄을 알기까지는 20년을 해매야 했습니다. 스님, 공부인들이 어떻게 공부를 하면 잘못되지 않고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공부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요. 간화선(看話禪)만이 정도(正道)고 다른 법은 모두 사도(邪道)입니까? <큰스님> 어떤 방법이건 지금 전해지고 있는 방법은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간화선(看話禪)이건 묵조선(?照禪)이건, 또 염불선(念佛禪)이건, 모두 자신의 근기에 맞춰 하는 것이니까, 어느 한 가지 만을 고집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람의 근기가 이성적인 사람을 위해서는 수법행(隨法行)이 발달하고, 감성적인 사람을 위해서는 수신행(隨信行)의 행법이 발달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발전으로, 각각의 행법내에마다 수많은 도인들이 배출되었으니, 행법의 우열을 가리거나, 어느 한 가지 행법만을 최고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북송시대(北宋時代)에 간화선(看話禪)을 대성한 임제종(臨濟宗)의 대혜종고선사(大慧宗호고禪師)가 역시 같은 시대에 묵조선(?照禪)을 비난하자, 같은 묵조선파에 속하는 진헐청료선사(眞歇淸了禪師)가 삼조(三祖) 승찬(僧璨) 스님의 신심명(信心銘)을 들어 현지를 나타내는 글을 써서 때의 악폐를 바로 잡고, 난선맹오(亂禪盲悟)의 무리들을 교계(敎誡) 하면서 종횡무애로 종고(宗고)를 나무랐습니다. 그 글을 '진헐화상염고(眞歇和尙拈古)' 라고 하는데, 진헐선사는 묵조선파에 속하면서도 염불선(念佛禪)을 했습니다. 진헐(眞歇), 굉지(宏智), 대혜(大慧) 세 분이 모두 천 여명의 회중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염불선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 후로도 원조(元朝) 때에는 중봉명본(中峰明本) 같은 거장(巨匠)이 30권에 이르는 저작에 근념아미타불가(勤念阿彌陀佛歌)를 포함하여 맥을 잇고 명조(明朝)때에는 선관책진(禪關策進)을 쓴 운서주굉(雲捿株宏)이 염불선을 하고 청(淸)을 거쳐 지금에 이르도록 대선사(大禪師)들이 간화선을 하면서 염불화두를 하고 있습니다. <기자> 스님, 염불선을 공부하는 방법을 상세히 말씀해 주십시요. 많은 공부인들이 뜻을 얻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큰스님> 염불선(念佛禪)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염불에 시삼마(是甚마) 화두를 붙이는 것으로, 염불을 하면서, '염불하는 자가 이 누구인가?(念佛者是誰)' 참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래가 부처라는 확신을 가지고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관(觀)하는 것으로 이것을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고도 합니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을 아울러 관(觀)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보통염불과는 다릅니다. 처 세 간 (處 世 間) <기자> 부처님께서 지금 이 땅에 출현하신다면 부처님께서는 세간중생(世間衆生)들에게 첫마디 말씀으로 무어라고 말씀하실까요? 스님께서 지금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고 싶은 한 마디 말씀은 무엇입니까? <큰스님> '연기(緣起)의 도리(道理)를 깨달으라'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연기의 도리를 알게 되면 아집(我執)도 법집(法執)도 모두 없어집니다. 현상(現象)이란 모두가 인연에서 일어난 것이니까 고집(固執)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연기법을 말하기는 쉬워도 얻기는 어렵습니다. <기자> 스님 앞으로 결코 멀지 않은 장래에 인류가 맞이하지 않을 수 없는 심각한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가장 심각한 점은 지구의 한계(限界)가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엔이 조사한 보고자료에 의하면 세계인구의 증가율은 념평균 2.1%로, 배가 증가하는데 33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1970년의 세계인구가 36억이었으니까, 2003년에는 지구상에 62억의 인구가 있게 된다고 추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상의 잠재적 농업적지(地)는 약 32억 헥타아르인데 지금 그 절반 정도가 경작에 이용되고 있고 나머지는 개척, 개발비가 너무 많이 들어 농지화할 수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인구가 증가하고 산업화 시 설이 확장되어감에 따라, 주택, 도로, 각종시설 등으로 농업용지가 침식 당하여, 100년 후에는 농경지가 약 반으로 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해마다 2천만 명 정도가 기아로 인한 영양 부족으로 사망하고 있고, 세계 인구의 약 3분지 1에 해당하는 저개발 인구의 50~60%의 인구가 지금 심각한 영양부족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공기오염 수질오염으로 환경이 파괴되면 생태계에 혼란이 일어나고 깨끗한 물이 없으면 농사도 지을 수가 없게 됩니다. 한 가지나 두 가지 정도의 지하자원이 고갈되면 2차산업에 마비현상이 일어나 전 산업수단이 멈춰서게 됩니다. 스님, 어떻게 하여야 인류의 앞날에 닥쳐오고 있는 지구의 절망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법화경 견보탑품에, 부처님께서는 설법 들으러 모여오는 분신보살들을 회상에 수용하시기 위해 팔방의 천상계로 세번 공간을 넓히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삼변토전(三變土田)에서 무엇인가 시사되는 바는 없습니까? <큰스님> 인류의 장래에 대해서 낙관하고 있습니다.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 환경의 오염, 자원의 고갈 등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분명하나, 나는 인간자체를 신뢰합니다. 모든 사람이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불성이 계발되면 극복하지 못 할 한계란 없습니다. 부분적인 특정분야만을 연구하는 과학도 어느 한 분야에서 진전을 얻으면 그것이 크나큰 보탬이 되지 않습니까? 유전공학이 발달하여 다수확에 비약적 성과를 기록해가고 있습니다. 불성에는 모든것이 다 갖추어져 있으니까 모든 분야가 다 한계를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기자> 마르크스는 그의 유물사관으로 인류역사를 원시 공산사회로부터, 농노, 봉건, 산업, 공산사회로 발전한다고 설명하고, 그 발전법칙으로 '부정(否定)의 부정(否定)' 이라는 혁명도식을 제시했습니다. 역사의 발전과정을, 투쟁을 통한 기존사회의 전복운동으로 본 것은 마르크스의 의도적 편견으로 생각됩니다. 이 부정의 부정도식이 공산 사회 이후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발전법칙으로서의 자가당착입니다. 그것이 운동법칙이 되려면 운동은 정지하지 않아야 하며, 공산사회 이후로도 발전해가야 합니다. 스님, 평화로운 조화 속에서 무한히 항상하고 발전하는 인류사의 발전 법칙이 불교사상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정의 도식이 이미 고전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유물사관을 순화하는 철학을 불교가 내놓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스님께 복안은 없으십니까? <큰스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를 지적한 점은 그의 공로라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를 이상사회로 옮겨가는 과정에 부정의 도식을 내세워 유혈혁명을 합리화한 것은 큰 잘못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결국 불교의 자아개발로 극복될 수 있습니다. '자아(自我)' 가 개발되면, 마르크스주의만이 아니고 모든 문제가 홍로점설(紅爐點雪)로 녹아 없어집니다. 유마경 불국품에 '보살이 정토(淨土:이상세계)를 이루고자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맑혀야 하나니, 맑은 그 마음을 따라 불토(佛土:이상세계)가 곧 맑아지느니라(菩薩菩欲得淨土當淨基心수基心淨則佛土淨)'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상가는 먼저 자아를 개발하여 그 마음을 맑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마르크스는 미치지 못하고 있지요. 이상사회 성취는 인류의 공동염원입니다. 이상사회를 향한 인류의 발걸음이 비록 느리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불성(佛性)주의, 인도주의로 갑니다. 불교가 더 적극적으로 노력한다면, 이상 사회는 훨씬 앞당겨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의 우월성은 현대과학이 자꾸 증명해가고 있습니다. 현대물리학이 물질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내어,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불교는 더욱 진리로운 모습이 뚜렷해지고, 귀의하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입니다. |
모든 것은 적당한 수준 즉, 중도가 제일입니다. 2013-12-02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