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시사토크 판에는 趙甲濟 대표가 출연했다.
최근 저술한 책 '악마의 변호인' 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큰 미스터리를 다뤘다. 인권 변호사 출신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학살자 김정일과 만나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측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과 싸워왔고 국제사회에서 북한을 변호했다.'고 이야기한다. 악마적 독재자인 김정일의 변호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노선으로 5년 간 國政을 이끌며, 우리나라는 북한의 核 강국화를 저지하지 못했고, 국내에선 종북 좌파가 득세하게 됐다. 이 책은 영화 변호인을 본 사람들에게 화두를 던지고 있다. 부림 사건의 변호인이었던 노무현 변호사가 피고인들을 통해 계급 투쟁적 세계관을 받아들였고, 대통령이 된 이후 대한민국에 거대한 좌경화가 일어난 것이다.".
노무현 前 대통령과의 일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조선일보에 박정희 전기를 연재하던 때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에게 만남을 청했다. 그는 박근혜 씨와 새 정치를 하고 싶으니 소개를 시켜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거절하면서 성사가 안 됐다. 2005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거국내각을 제안했는데 옛날 생각이 났다. 알제리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김정일을 칭찬하자, 노무현 대통령이 화를 내며 박정희 前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을 자랑하며, 새마을 운동가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공적으로는 반미·친북적으로 한국을 몰고 가며 북한의 핵 강국화를 도왔다."
아베 총리가 中日관계를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상황과 비유한 것과 관련 "아베 총리의 발언을 너무 뒤틀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나는 화두를 옮겨 생각하고 싶다. 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던 발칸반도와 비슷한 상황이 한반도에 존재한다고 본다. 더 위험한 것은 한반도에 핵전쟁의 위협이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20~40여 개의 핵무기를 보유한다고 보고 있다. 북한이 미사일에 장착 가능하도록 핵무기 소형화에 성공했고 우라늄 농축에 성공, 이스라엘 수준의 핵무기 보유도 가능하게 되었다. 김정은이 만약 핵폭탄 단추를 누른다면 10분 안에 서울 상공에 타격된다. 시뮬레이션 상으로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급이 서울에 떨어지면, 90만 명이 사망한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유럽보다 한국은 더 위험하다. 재래식 무기에 의한 충돌이 에스칼레이션 되면 동북아 大戰이나,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趙 대표는 "대책 마련을 위해 시급히 미사일 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하는데, 왜 미국과 협력 하냐며 국내 종북 좌파 세력들은 거세게 반발한다. 목숨이 달린 일인데, 어쩜 이렇게 한가할 수 있는가. 국민들과 지도부, 정치권의 총체적인 타락이다. 언젠가는 한반도의 위협 문제를 직시할 때가 올 것이다."고 말했다.
`현대사 최대의 미스터리를 풀었다.`
강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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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 대표, "현대사 최대의 미스터리를 풀었다."
TV 조선 판에 나와 북한의 핵능력 밝혀.
그러나 뒤에서는 반미·친북을 해가며 북한의 핵 강국화를 도왔으며,또한 대한민국에
거대한 좌경화 졸개들을를 양성해놓았으니,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나라를 뒤엎으려고하는
오늘의 현상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것이다.언젠가는,분명히 진실은 밝혀질날이
올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2014-01-29 13:31
그의 머리에 들어간 계급투쟁론적 세계관은 대한민국을 좌경화시켰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1부 강연 연사가 조갑제씨’
좌경독서회 사건을 소재로 하여 만든 영화 ‘변호인’을 보고, 고문에 의한 ‘용공조작’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관계와 다르다. 이 영화를 보고 그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주장, 현 정부를 비판하는 데 이용하는 것은 정치적 선동이라 할 것이다. 이 영화를 본 문재인 의원은 “재미있게 그리고 감동깊게 봤다”면서 “부당한 시대에 지식인이 또 시민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들은 그렇게 하는가를 물어보는 것 같다. 33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가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영화”라고 말하고, 재심이 진행 중인 부림사건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리라고 확신하고, 부림사건이 조작됐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밝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한국일보).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 영화를 보고 나와 쓴 트위터 글에서, “아, 그런데 지금 이 나라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눈물이 난다”고 했다.
좌경독서회 사건에 불과한 부림사건은 그들을 만나고 강연도 한 나에겐 사상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나 노무현을 의식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변호사 노무현이 부림사건을 계기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더니 鬪士(투사)로 바뀌는 계기에 필자의 이름이 나온다. 1985년 2·12 총선으로 민주화 흐림이 大勢(대세)가 된 직후 부산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 대하여 문재인 씨는 2011년에 나온 《운명》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노무현은 ‘그 일로 단번에 과격한 변호사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는, 부산시경국장(지금의 부산경찰청장)과 관할 경찰서장을 형사 고소했지만 흐지부지 넘어갔다는 것이다. 필자는 강연 차 부산역에 도착하였을 때 기다리던 정보 형사들로부터 ‘강연장이 봉쇄되었으니 돌아가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무현의 머리에 들어간 ‘민중’과 ‘계급’
노무현은 좌익운동권 출신은 아니지만 계급투쟁론적 의식화를 수용할 만한 감수성의 기반은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전적 에세이에서 고 적었다(《여보, 나 좀 도와줘》). 일명 ‘가방사건’은 富者(부자)에 대한 노무현의 부정적 인식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당시 초등학교 학생들은 보자기에 책을 싸 가지고 학교를 다녔다. 형편이 어려웠던 노무현도 마찬가지였다. 5학년 체육 시간 때 노무현은, 한 친구와 함께 부잣집 아이의 고급 가방을 면도칼로 찢었다고 한다(171페이지 내용 재구성).
여성에 대한 굴절된 인식도 드러냈다. 그는 “나는 다짐을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마누라만은 손아귀에 넣고 살겠다”고 했다(上同).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나는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했다”고 고백했다(같은 책 125페이지). 친구들이 ‘형수를 꽉 잡고 사는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는 “조져야 돼. 밥상 좀 들어달라고 하면 밥상 엎어 버리고, 이불을 개라고 하면 물 젖은 발로 이불을 질겅질겅 밟아 버리는 거야. 그렇게 해야 꽉 잡고 살 수 있는 거야”라는 말도 했다(上同).
사법고시 합격 후 노무현은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도 일종의 비주류로 취급받았다.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노무현은 “처음 얼마간은 연수원에서 외톨이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88페이지). 그는 “다들 패거리를 지어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데 나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혼자 서성거려야 했다”고도 했다(上同). 노무현은 고향에선 나름 촉망받는 젊은이였지만, 전국의 秀才(수재)들만 모인 사법연수원에서는 소외감을 느낀 모양이다.
노무현을 따라다닌 또 다른 그림자는, 장인 권오석의 인민군 부역 前歷이었다. 대검찰청 공안부가 1973년 발간한 《좌익사건실록》(제10권)에 따르면, 권오석은 1949년 남로당에 가입, 6·25남침전쟁 당시 경남 창원군 진전면에서 면장 등 11명의 양민을 학살한 데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경남 창원군 진전면 치안대 활동사건’으로 명명되었다. 그는 비상사태 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제3조 1항·4조 5항, 국가보안법 제1조·제3조 위반 및 살인죄, 살인예비죄 등으로 기소되었다.
권오석에 대한 정확한 구형량과 선고형량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좌익사건실록》은 권오석의 구형량과 선고형량에 대해 ‘기록의 일부 유실로 기재 불능’이라고 적고 있다. (2002년 6월호)에 따르면, 권오석은 수감 도중 폐결핵·兩眼(양안) 실명 등의 이유로 1956년에 刑(형)집행 정지로 출소했다. 그는 1961년 3월27일 殘刑(잔형)집행을 위해 再수감되었고, 1971년 마산교도소에서 獄中(옥중) 사망했다.
계급투쟁론자를 ‘뜨거운 인간애에 불타는 사람’
노무현은 初選(초선) 국회의원이던 1988년 7월8일, 임시국회 對정부 질문에 나섰다. 그의 발언 요지는 노동자 옹호와 기업과 정부에 대한 비난이 主였다. 특히 盧 의원은 세 번 ‘계급’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① (출처: 노무현재단 홈페이지 ‘노무현 사료관’)
② (출처: 上同)
③ (출처: 上同)
노무현은, 당시 상황을 계급투쟁적 대결구도로 보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에게 계급혁명의 이념을 심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즉 좌익을 ‘뜨거운 인간애와 도덕적 이념에 불타’는 이들이라고 미화하였다. 2014-02-01 16:47
노무현 의원의 국회의원 회관내 사무실엔 ‘사람 사는 세상’이란 제목의 액자가 있었고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통일민주당 소속이던 노 의원은 1989년 초 국회의장에게 의원직 사퇴서를 우편으로 보낸 뒤 잠적한 적이 있었다. 우종창 〈주간조선〉 기자가 입수한 사퇴서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1990년 노무현은 3당 합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 김종필 총재의 공화당과 손잡고 민자당을 만든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서 이탈한 의원들과 함께 소위 ‘꼬마 민주당’을 만들었다. 노 의원이 통합 야당의 대변인이 되자 언론에선 그의 프로필을 쓰면서 는 취지의 보도를 했다. 노 의원은 신문사와 방송사 정치부에 해명서를 보냈다.
그는 면서 라고 했다. 禹鍾昌(우종창) 기자는 1991년 10월6일자에서 라는 제목의 추적 기사를 실었다. 노 의원은 명예훼손이라며 禹 기자를 상대로 형사고소, 조선일보사와 기자에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민사 1심에서 부분 승소(3억 원의 손해 배상 청구액 중 2000만 원 인정)한 노무현 의원은 提訴(제소)와 고소를 취하했다. 노 의원은 자전적 에세이에서 는 요지의 주장을 했다.
禹 기자는 항소심에서 다툴 준비를 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화해를 종용, 盧 의원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 사과를 하였다고 한다. 헤어질 때 禹 기자는 “노 의원에 대한 기사는 계속해서 쓸 것입니다”고 말했는데 그는 처음으로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라고 한다(《권력의 역설-우종창 파워취재기》).
“당신이 쓴 기사는 나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다. 만약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바로 쓰지 말고 잘못된 것 10개를 모은 뒤 하나만 써주었으면 좋겠다.” 2014-02-01 16:41
노무현 변호사가 부림사건의 피고인들로부터 받은 영향은 ‘좌경의식화’이고 그 이후 좌파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고, 대통령이 된 이후엔 그런 가치관에 기초한 정책을 펴 한국을 좌경화시켰다는 나의 假說(가설)을 입증하려면 대통령으로서 남긴 言動(언동)을 계급투쟁론이란 잣대로 분석해야 한다. 그도 대통령 시절 좌파를 자처하였는데, 좌파의 핵심 논리는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이다.
盧武鉉(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2004년 5월말 연세대 강의를 통해서 진보와 보수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이렇게 설명했다.
“진보, 보수가 뭐냐. 보수는 힘이 센 사람이 좀 마음대로 하자, 경쟁에서 이긴 사람에게 거의 모든 보상을 주자, 適者(적자)생존을 철저히 적용하자, 弱肉强食(약육강식)이 우주의 섭리 아니냐, 그렇게 말하는 쪽에 가깝다. 진보는 더불어 살자, 인간은 어차피 사회를 이루어 살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냐, 더불어 살자다. 자본주의에 사는 한 보수는 약육강식, 되도록 바꾸지 말자는 것이다. 특히 한국처럼 아주 오른쪽에 있는 나라는 더더욱 바꾸지 말자는 기득권 향수가 강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해하면 간명하다.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를 다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다.”
노무현의 보수에 대한 反感(반감)과 진보, 즉 좌파에 대한 생각은 자신의 좌편향된 가치관, 즉 계급투쟁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1961년에 아프가니스탄, 짐바브웨, 캄보디아보다도 못한 국민소득을 가졌던 나라(103개국 중 87등)를 50여 년 만에 세계 7위의 수출대국, 삶의 질 세계 12위의 복지국가로 바꿔놓은 主力은 보수층으로 불리는 세력이다. 이들에게 '별놈의 보수를 갖다 놓아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다'고 극언을 한 사람이, 변화를 거부하고 무자비한 독재로 인류역사상 最惡의 인간도살을 자행한 守舊(수구)좌익의 본산 북한정권에 대하여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를 비교하면 그의 머리에 들어가 있었던 사상의 뼈대를 읽을 수 있다.
2007년 10월2일, 訪北(방북) 중 평양 만수대 의사당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북한주민들의 행복이, 프롤레타리아가 정권을 잡아 이른바 인민主權(주권)을 행사하는 독재의 전당에서 나온다는 말은 계급투쟁론적인 사고방식의 완벽한 표현이다.
헌법과 국군에 대한 공격
한국에서 국민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헌법이다. 이 헌법에 대하여 그는 “그놈의 헌법이 토론을 못하게 돼 있으니까 (대통령이 직접 토론하는 것은) 단념해야지요”(2007년 6월2일 참여정부평가포럼 연설)라고 했다. 사회주의 독재 장치는 ‘전당’이고 자유민주주의의 심장은 ‘그놈’이다.
계급투쟁론 신봉자였다는 증거이다.
헌법의 명령에 따라 국가의 안전보장을 수호하는 기구는 국군이다. 계급투쟁론 신봉자들은 헌법과 국군을 지배계급의 도구로 규정,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타도 대상으로 본다. 노무현은 국군통수권자로 있으면서도 국군을 이렇게 매도하였다.
“젊은이들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히지 말고 그 동안에 열심히 활동하고 장가를 일찍 보내야 아이를 일찍 낳을 것 아니냐. (전작권) 회수하면 안 된다고 줄줄이 몰려가서 성명 내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미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바짓가랑이 매달려 가지고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 형님 백만 믿겠다.’ 이게 자주국가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 있겠나.”(2006년 12월21일,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연설)
계급투쟁론이 머리에 박히면 세상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편을 가른다. 반대 세력을 기득권 세력, ‘계급의 원수’ 등으로 몰고 증오심을 부추긴다. 자기편은 무조건 감싼다. 노무현의 경우엔 계급적 특권이나 박해를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런 계급적 관점을 유지, 정책에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는 한국의 보수언론을 이렇게 비방하였는데, 대통령이 좌익운동권 수준의 언어를 구사한다.
“지난날 독재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민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해왔던 守舊(수구)언론들은 그들 스스로 권력으로 등장해 민주세력을 흔들고 守舊(수구)의 가치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2007년 6월10일, 6월 대시위 20주년 기념사)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에 보내야’
한총련은 북한정권의 전위대 역할을 하던 좌익학생운동 조직이었다. 노무현은 이들을 아주 따뜻하게 바라본다. 이 또한 계급투쟁론적 감정일 것이다.
“〈한겨레21〉에 올라와 있는 한총련 회장 편지를 읽어봤다. 일부 보도나 사회 일각에서 말하듯이 그렇게 단순히 어떤 사상에 경도돼 우리 사회에 철없는 공격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편지 속에서 확인했다.” (2003년 5월1일 MBC ‘100분 토론’)
계급투쟁론에 빠지면 법을 지배계급의 압제 도구로 보므로, 노무현은 한총련이나 공산주의자 같은 국가 반역자를 다스리는 국가보안법에 대하여 특히 냉소적으로 말한다.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은 폐기하고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에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2004년 9월 5일 MBC ‘특별대담’)
그는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에서도 공산당이 허용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한 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2003년 6월10일 일본 방문 중 발언)고 했다. 공산당과 대치, 死活(사활)을 건 무장·이념대결을 벌이는 나라에서 敵(적)에 자유를 파괴하는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의미의 주장을 한 대통령이 있었다! 그래도 나라가 유지된 것은 또 하나의 기적이다.
계급투쟁론 신봉자는 그 계급투쟁론을 敎理(교리)로 하여 세워진 북한정권을 절대로 반대할 수 없다. 성경을 믿는 이가 교회를 비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노무현은 북한의 核개발을 막아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도 核개발을 사실상 비호하였다.
“미국의 對北(대북) 군사행동에 반대한다. UN안보리를 통한 제재에도 반대한다. 북한에 경제지원을 보다 더 해주고, 체제안전을 약속해야 한다.”(2006년 8월18일)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것은 선제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며 남한의 지원 與否(여부)에 따라 핵 개발을 계속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2006년 5월29일 향군지도부 초청 환담 中)
“(북한에 대해) 많은 양보를 하려고 합니다. 제도적·물질적 지원, 이런 것은 조건 없이 하려고 합니다.”(2006년 5월9일 몽골 방문 중)
“1987년 이후 북한은 테러를 자행하거나 테러를 지원한 일이 없다. 지금도 테러조직과 연계되어 있다는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2004년 11월 12일 국제문제협의회 LA지부 간담회)
1997년 김정일의 본처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의 아들 이한영 씨를 찾아내 암살한 이는 김정일이 보낸 공작원이었다.
“북한의 붕괴를 막는 것이 한국 정부의 매우 중요한 전략이다.”(2006년 12월9일, 뉴질랜드 교포 간담회)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서 北核(북핵)을 말하라는 건 가급적 가서 싸움을 하라는 것이다.”(2007년 9월11일, 청와대 춘추관 기자회견) 2014-02-01 16:27
노무현의 계급투쟁론적 인식이 한국 현대사에 적용되면 善惡(선악)과 彼我(피아)개념이 뒤집어진다. 대한민국과 미국을 비판하고 중국을 편든다.
“참여정부의 출범으로 아픔의 근현대사는 막을 내리게 됐다. 지난날은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좌절과 굴절을 겪어야 했다.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2003년 3월1일 3·1절 기념식)
“몇 년 지나면 용산 기지는 우리 국민들의 손에 들어온다. 간섭과 침략과 의존의 상징인 그 용산 기지가 우리 국민들의 손에 들어온다.”(2004년 3월1일 3·1절 기념식)
그는 2003년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학생들 앞에서 가장 존경하는 중국인으로 등소평과 함께 毛澤東(모택동)을 꼽았다. 한국 대통령이, 북진통일 직전에 중공군을 보내 한반도의 자유통일을 막은 자를 존경한다고 한 것은 이스라엘 대통령이 히틀러를 존경한다고 한 것과 같다.
그의 통일관도, 자유민주 체제를 채택한 국가의 정당성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계급투쟁론의 영향을 받은 듯 헌법 위반이다. 북한지역을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헌법 제3조), 평화적 자유통일을 하라(헌법 제4조)는 헌법의 명령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국가연합체제에서 각기 지방정부를 갖게 될 것이며 통일수도는 개성 일대에 대단히 상징적으로 만들어질 것이다.”(2004년 2월24일 방송기자클럽 회견)
북한정권을 대한민국과 同格의 국가로 인정하는 反헌법적 논리이고, 북한의 연방제 공산화 통일 방안을 수용한 것이다. 노무현은 신행정수도로 위장한 수도 이전의 진짜 의도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舊세력의 뿌리를 떠나서 새 세력이 국가를 지배하기 위한 터를 잡기 위해서는 遷都(천도)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한 시대, 지배세력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 큰 변화를 국민이 선택한 것이다.”(2004년 1월29일)
‘세력’을 ‘계급’으로 바꾸면 계급혁명의 한 방도로 遷都(천도)를 추진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계급투쟁론이 도시계획에까지 全方位的(전방위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어린이들 모아 놓고 계급적 발언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2004년 3월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기자회견에 나와서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을 거명, 이렇게 말했고 수 시간 뒤 남 사장은 漢江(한강)으로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이판에 제 형 노건평 씨까지 끼어들어서 참 미안하기 짝이 없다. 대우건설은 워크아웃 기업인데 대우건설 사장의 유임을 청탁한다는 뜻으로 3000만 원을 받았다. 어떻든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돈은 이미 돌려주었다고 한다. (중략). 형님의 실수가 있더라도 제가 잘 관리할 터이니 그렇게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중략) 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
그는 남 사장을 기득권자로 몰기 위하여 자신의 형을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애써 格下(격하)하였다. 利權(이권)개입을 자주 한 현직 대통령의 친형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2006년 10월8일 조선일보 金大中(김대중) 칼럼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계급투쟁적 발언을 이렇게 비판하였다.
金大中 주필은 ‘모든 것이 드러난 한 작은 사건이었다’고 했다. 드러난 ‘모든 것’이란 그의 뇌리에 박힌 계급투쟁적 가치관이다. 노무현과 그 세력을 좌파라고 할 때 그 판단 기준은 그들이 이 세상을 마르크스 식의 계급투쟁론으로 본다는 점이다.
同年 10월10일字 조선일보 社說(사설)은 대통령의 한글날 경축사를 비판했다.
‘왼쪽 정렬 세력’의 비밀
1982년 노무현 변호사가 釜林사건 변호인이 되어 좌익운동권을 변호하다가 접하게 된 계급투쟁적 가치관은 그 20년 뒤 대통령이 된 후 국가 정책에 전면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그의 입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이념과 사상은 낡은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라 무서운 것이다. 이념은 ‘공동체의 利害(이해)관계에 대한 自覺(자각)’이고 ‘자기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이론화된 신념’이기 때문이다. 증오의 과학인 계급투쟁론 신봉 세력을 상대로 이기려면 종교적 신념이나 삶을 건 신념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이념 갈등 사건에서 자동적으로 한 편에 서는 세력이 있다. 광우병 난동-천안함 爆沈(폭침)-연평도 포격-철도노조 불법 파업-한국사 교과서 파동 등으로 편이 갈릴 때 왼쪽으로 정렬하는 세력은 북한정권, 민주당, 통진당(舊민노당), 정의당, 민노총, 전교조, 한겨레신문, 좌경 종교단체 등이다. 이런 세력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조작하든지 왜곡하여 북한정권이나 불법세력 편을 든다. 평소 북한정권을 비판하던 이들까지도 대한민국과 북한정권, 법치와 불법의 대결구도가 되면 북한정권과 불법 편을 든다. 좌파라고 통칭되는 세력은 거의가 反대한민국, 反법치 성향이다. 스스로 從北(종북)이 아니라고 하는 좌파도 이념문제에선 대한민국 편을 들지 않는다. 한국엔 ‘反北(반북)좌파’가 없다고 보면 된다.
이런 자동적 줄서기의 비밀을 알면 한반도 상황을 보는 눈이 밝아진다. 이 비밀을 알면 많은 의문이 풀린다. 예컨대, 휴전선 남쪽에선 용감하던 소위 민주투사들이 왜 反민주의 元兇(원흉)인 북한 독재자 앞에 서면 비굴해지는가? 인권을 신념으로 여긴다는 세력이 왜 북한인권법 통과에 대해서는 敵對的(적대적)인가? 구체적으로 金大中(김대중), 盧武鉉(노무현)은 왜 김정일 앞에서 작아졌던가? 부림사건 변호인은 왜 악마적인 김정일의 변호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가?
한반도의 가장 큰 수수께끼의 정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계급투쟁론’이다. 계급투쟁론이란 세계관에 물들면 그렇게 행동한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발전시킨 계급투쟁론은 간단하다.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은 처음도 끝도 계급투쟁론이다.
로 시작되는 序論(서론)은 는 本論(본론)으로 이어진다.
공산당 선언은 결론에서 계급투쟁의 방법으로서 폭력을 다시 강조한다.
출처 : '惡魔의 변호인'(Devil's advocate) 2014-02-01 16:28
대한민국 대통령이란 거룩한 이름을 갖고 평양에 가서 전체주의 독재의 産室(산실)을,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고 칭송한 그는, 保守(보수)를 ‘별놈’, 헌법을 ‘그놈’, 군대를 ‘인생 썩히는 곳’으로 폄하했다. 핵폭탄을 든 전쟁범죄자 앞에선 “북측의 입장을 갖고 미국하고 싸워왔고, 북측의 입장을 변호해왔습니다”고 한 사람이, 5만4000명의 젊은이들을 희생시켜 한국을 구한 동맹국의 국방장관을 만나선 "아시아 최대의 안보 위협은 미국”이라고 했다. 기가 막힌 게이츠는 “盧는 반미주의자이고 약간 돌았다”고 썼다. 1982년 좌경독서회 사건을 변호하던 그를 딴 사람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한국 현대사 최대의 미스터리를 ‘역사 추적자’ 趙甲濟가 풀었다.
“노무현이 변호한 것은 공산주의”
‘釜林(부림)사건' 수사검사는 “노무현이 변호한 것은 공산주의였다”고 말하고, 보안법 위반 부분에 무죄를 선고하였던 1심 판사는 그 판결을 후회하면서 反좌파 운동가로 變身(변신)했다. 한 기자는 “노무현 美化(미화)보다는 국가 부정에 방점이 찍힌 영화다”고 평했다.
‘대한민국의 변호인’이 나설 차례!
인류역사상 최단시간에 최소한의 人命(인명)희생으로 최대한의 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과 그 주인공들은 ‘세계사의 聖人(성인)’으로 추대받을 자격이 있다. ‘역사의 神(신)’이 聖人자격심사를 주재한다면 계급투쟁론에 홀린 노무현을 ‘Devil's advocate'(데블즈 에드보케이트·악마의 대리인)로 임명, 대한민국이 이룩한 모든 성과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비판하도록 시킬 것이다. 이젠 대한민국의 변호인이 나설 차례이다.
선동의 凶器를 막는 진실 정의 자유의 방패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북한독재정권을 비판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가 증오의 기술자들에게 완벽하게 학살당한 ’역사 전쟁‘의 폐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역사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고 사는 '심장 없는 사상의 폭군들'에게 선동당한 예술과 문화는 凶器(흉기)가 된다. 우리도 '대한민국의 변호인'이 되어 서점과 학교를 수복하자. 이 책이 선동의 凶器를 막는 진실 정의 자유의 방패이다. 2014-02-03 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