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에 닮긴 삶(9)
허태기
view : 5316
거울 속에 닮긴 삶(9)
2월에 접어들어 일주일동안 눈이 계속 내렸다. 내가 사는 서울지역에는 그다지
많은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강원 동해안 지역에 1m가 넘는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뉴스를 전하는 TV화면에는 도로가 불통되어 도시의 기능이 마비되고 산간마을에
서는 폭설로 인명이 위태로운 사태가 발생하여 긴급구조대가 출동하기도 했다.
태국이나 아프리카에서 온 관광객들은 한국의 겨울눈을 보고 신의 축복이라고
감탄하고 부러워한다. 그 나라에서는 평생 동안 눈 내리는 광경을 볼 수 없기 때문
이다. 그러기에 처음 대하는 눈이 한없이 신비롭고 신기한 것이다. 삭막한 겨울철
에 순백의 부드러운 솜 같은 하얀 눈이 꽃잎처럼 내려서 세상을 온통 은백색으로
만드는 광경은 가히 신의 축복이라고 할만하다. 정결하고 아름다운 것을 이상으로
추구하는 인간에게 눈은 꿈결처럼 아름답고 상큼하며 낭만적이다.
눈은 인간의 뇌리에 깊숙이 박힌 이상세계의 향수인지도 모른다. 헤밍웨이의 소
설 ‘킬리만자로의 눈’ 서두에는 “킬리만자로(해발5.895m)의 눈 덮인 정상부근에는
말라서 얼어 죽은 한 마리 표범의 시체가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라고 시작된다. 이상세계를 향한 인간의 상
념을 끝없이 펼치게 하는 문구이다. 러시아의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지바
고’에서 설원을 배경으로 의사이며 시인인 유리지바고와 라라의 애틋한 사랑이나
겨울연가에서의 청춘남녀의 풋풋한 사랑 또한 첫눈을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눈은 인간의 정서를 자극하여 특히 남녀 간의 사랑에 없어서는 안 될 소
스(sauce)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시(詩)나 소설 영화 등 이름난 작품에서
눈 내린 전경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에
서처럼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가로지르며 거인의 입김처럼 증기를 내뿜고 달리는
기차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연인간의 이별장면은 보는 이의 가슴을 울컥하게 한다.
금년 2월 러시아 소치(Sochi 흑해연안의 지방도시)에서 거행된 동계올림픽(2월7일
~23일)의 화려한 축제들도 눈이 없으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눈은 사람들에게 한없는 꿈과 낭만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눈도 지나치
게 많이 내리면 인간에게 재앙을 초래하는 악마의 저주로 돌변한다. 이번 폭설로
강원 동해안처럼 도로 불통으로 도시기능이 마비되고 비닐하우스 등 생계시설의
파손으로 수백억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초래하는가하면 2월17일에는 경주지역 모
대학신입생의 오리엔테이션중에 리조트강당의 지붕이 눈의 하중으로 무너져 100
여명이 매몰되어 10명이 죽고 수십명이 다치는 인명사고가 발생했다. 무엇이건 지
나친 것은 화를 부른다는 사실이 여실히 입증된 것이다.
눈은 인연(因緣)따라 내리는 자연적인 현상으로서 신의 축복도 악마의 저주도
아니다. 이러한 자연현상에 어떻게 순응하고 슬기롭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자연은 아무런 욕구가 없지만 인간은
자기중심의 잣대로 자연을 찬탄하기도하고 원망하기도 한다. 눈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자연현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눈에 대한 시 한편을 올려본다.
눈(雪)
靑江 허태기
하얀 이름으로
널 손짓하니
분분히 메밀꽃 되어
마음껍질 사르르 벗기면서
순결한 나신으로
포근히 나를 감싸 안는다
너와 내가
하나 될수록
세상은 고요에 들고
목련은 침묵에 짓눌려
하얗게 눈물짓는다.
- 주간한국문학신문 기고 칼럼(2014.3.19)/청강 허태기 -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