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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동포 同體大悲로 품어야…“새터민 포교 일당백으로 해내죠” ( 현대불교신문 1월 23일자 기사 )|

권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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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째 헌신… 발로뛰며 후원처 찾아다녀
고향과 가족 그리운 마음 달래기 주효
〈부모은중경〉강독시행…법회 참가자 5배 늘어
봉사활동, 가정체험, 장학금 지급 이끌어내
2014 통일부장관상 수상·통일교육위원 위촉

“새터민은 향후 불교포교 중요 인적자원”
불교계 여전히 ‘뒷전’…후원자 발굴 큰 어려움

   
▲ 홍성란 포교사는 …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난 홍성란(법명 보현화)씨는 2008년부터 탈북동포정착교육시설 상임포교사로 활동해오고 있다. 서울 능인선원에서 불교기초과정과 경전반 등을 3년 넘게 수학한 후 천안 각원사불교대학을 졸업했다. 2008년 제13기 조계종 포교사로 품수했다. 탈북동포정착교육시설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새터민 포교를 펼치고 있다. 조계종 포교사단 인천경기지역단 통일팀장을 역임했으며 2014년에는 통일부장관상을 수상했으며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사진=노덕현 기자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자리에 앉아 차 한 모금을 마시자마자 입을 뗀 그녀는 숨가쁘게 말을 이어갔다. 불교, 통일, 북한. 그녀가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단어였다. 포교사로서는 최초로 통일전문교육위원에 임명되고 통일부 장관상을 받기도 한 홍성란(55) 포교사. 햇수로 8년 동안 그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새터민포교에 헌신해왔다. 탈북동포들에 대한 어떤 정책도 제안도 후원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혼자 힘으로 새터민들을 불교 법당으로 모았고 후원처를 찾으러 전국을 뛰어다녔으며 타종교가 독식하던 프로그램을 불교계에서 운영하게 만들었다. 땅을 개간하듯 억척스레 고군분투해왔으니 그동안의 노고와 수고, 못다한 말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었다. 준비한 질문지가 무색할 정도로 술술 이야기를 풀어놓던 그는 말하는 내내 새터민 포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기 바빴다.

열세였던 불교 氣펴기 프로젝트
“탈북동포정착교육시설에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기독교, 가톨릭, 불교 세 종교가 일요일마다 새터민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해요. 이웃종교에서는 주로 물량공세로 처음부터 새터민들의 환심을 사요. 북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오징어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해 퇴소할 때도 냉장고, 전자렌지 등을 챙겨줬죠. 조직적 지원이 남달라요. 반면 불교에서는 아무것도 줄 게 없더라구요. 종단 지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포교 프로그램 역시 전혀 구비돼 있지도 않았어요.”
그녀가 처음 탈북동포정착교육시설에 갔을 때만 해도 타종교 시설에는 2백명 가량이 모여있던 반면 불교 법당에는 2~30명이 있는게 전부였다. 홍 포교사는 새터민 포교에 거의 손을 놓다시피한 불교 현실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불법이 기를 펴지 못하고 소홀히 취급당하고만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물품 지원은 힘들더라도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았다. 그녀는 법회 때 읽던 경전을 천수경에서 부모은중경으로 대체하며 프로그램부터 손보기 시작했다. 아직 종교에 낯설고 한국문화에 어리둥절한 새터민에게 무슨 말인지도 모를 주력을 외우게 하는 것보다는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방편으로 부모은중경이 딱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감동받은 새터민이 늘기 시작하면서 법당에 모이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홍 포교사는 이에 머물지않고 2시간 남짓한 법회시간을 재미있게 꾸려주기 위해 연꽃만들기도 도입하고 북한 노래를 채보해 노래집도 직접 만들어 그들이 불교를 즐겁게 즐기도록 도왔다. 북한에서는 한복을 입을 기회가 없었다는 새터민들의 말을 흘려 듣지 않고 수계식때 한복을 입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번져 지금은 매주 1백여명이 꾸준히 법당을 찾는다.
“새터민은 불법 홍포를 위해 아주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가 3천명이 넘는다고 해요. 이분들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동포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시나요? 하나님 덕분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해요. 거기다 이곳에서는 타종교가 새터민들을 위해 지원하는 어마어마한 물량에 이길 수가 없어요. 퇴소하고나서도 새터민들이 모이는 회관을 따로 운영할 정도로 적극적이죠.”
홍 포교사의 말에 따르면 2만여명에 달하는 새터민들 중 열에 여덟은 기독교 혹은 카톨릭을 종교로 가지고 있다. 그는 늘 교육생들이 퇴소하고 난 후가 걱정이다. 전국 도시 외곽으로 흩어지는 새터민들이 갈 만한 절을 찾지 못해 불교와의 인연이 끊어지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법당에 자주 나오던 새터민은 퇴소후 기독교인이 됐다. 모여사는 새터민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것도 유효했지만 교회에서도 승합차를 운영할 정도로 편의를 봐주었던 것이다. 그는 하루 속히 거점 사찰을 만들어 새터민 포교에 앞장서야 한다고 했다. 새터민들을 위한 법회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모여 유대감을 나누는 커뮤니티 기능역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터민은 향후 북한 포교 인적자원으로 여겨야 해요. 평양에는 신학교가 있어 목사들을 양성하고 있고 새터민은 그들대로 타종교를 신앙으로 삼고 있으니 향후 통일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가서야 포교한다고 나서봐야 한참 늦죠.”
생각할수록 불교의 앞날이 캄캄했다. 타종교에 비해 뒤처졌다는 조바심과 안타까운 현실 인식은 그녀를 새터민 포교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 탈북동포정착교육시설 수계식 장면. 북한에서 한복을 한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한복이 인기다.

남들 다 하는데 왜 불교만 못하나요?
탈북동포정착교육시설에는 남한의 가정을 체험해보며 문화를 익히고자 도입된 가정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1명당 1가정을 매칭시켜 1박 2일을 함께하는 프로그램으로 한 번에 1백명 이상씩 체험을 나가기에 인적 네트워크를 지닌 종교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는 매번 진행하기가 힘들다. 때문에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열세였던 불교는 제외되고 기독교와 천주교 두 곳에서 번갈아가며 진행하고 있던 터였다. 새터민들이 시설에서 나와 일반인들과 함께 하는 첫 프로그램이었던 만큼 홍 포교사는 여기서 불교만 누락되는 게 옳지 않다고 여겼다. 불자 새터민이 겪은 사건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가정체험에 자원했던 여성이 염주를 차고 있던 새터민이 잠든 틈을 타 마귀가 물러가야 한다며 새터민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던 것이다. 실무자들에게 이러한 종교적 부당함을 여러 차례 설득한 끝에 1년 후 기회가 왔다.
“그 때 환희심은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거에요. 우린 더 잘할 수 있다고 내내 말씀드렸죠. 남들 다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나요. 포교에 있어 불교도 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기뻐한 것도 잠시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적을 두고 다니는 사찰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부탁할데도 마땅찮았다. 겨우겨우 수소문해 스님들을 찾아가면 새터민을 간첩취급하며 난색을 표하기 일쑤였다. 앞이 깜깜했다. 호언장담하고 이뤄낸 성과인데 이대로 불교가 망신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부산까지 쫓아가 안면이 있던 금천선원 정운 스님에게 사정사정해서 부산지역 13개 사찰에서 동참하기로 결정, 총 130가정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안양 한마음선원, 불광사, 봉녕사, 용화사, 각원사 등을 돌아다니며 가정체험을 진행했다. 108순례로 유명했던 도선사에는 사람을 많이 모을 수 있겠단 생각에 무작정 혜자 스님을 찾아가 간곡히 부탁드렸다. 혹시라도 갑자기 취소되는 경우가 생기면 밤 10시에도 스님들을 깨울 수 밖에 없었다. 원망을 듣더라도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이처럼 가정체험에 열심히 매달렸던 것은 새터민들이 처음 접해보는 남한의 가정이 바로 포교 현장이 되리라 생각해서였다.
“그 효과는 어마어마해요. 남한 가정에서 따뜻한 밥을 먹다보면 친정엄마를 만난 것 같다고 새터민들이 굉장히 좋아해요. 이런 인연으로 꾸준히 연락하며 지내는 사람들이 많은 걸로 알아요. 때문에 지금까지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곳들도 종종 있어요. 정운 스님은 새터민 학생에게 매달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어요.”
또 하나 홍 포교사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새터민들의 봉사체험이었다. 음성 꽃동네로 가서 봉사를 하고 왔던 이들이 카톨릭에서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구나 하고 감명을 받는 것을 보고 복지하면 불교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 연꽃마을에서 운영하는 파라밀요양원도 봉사활동장소로 추가하도록 실무자들을 설득했다.

   
▲ 새터민 가정체험을 진행한 안양 한마음선원에서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사전 교육을 하고 있다.

새터민 아픔이 내 아픔
일당백을 해내는 홍 포교사 덕분에 탈북동포정착교육시설에서만큼은 이웃 종교의 득세도 8년 전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날씨가 아무리 궂어도, 몸이 아파도, 심지어 코뼈가 부러져 수술을 해야할 때도 그녀는 매주 일요일 새터민들을 만나러 갔다. 8년간 단 하루도 걸러본 적이 없다.
“저도 몸도 피곤하고 나가기 싫을 때도 있어요. 스님들 바짓가랑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때도 있고 원망 들어가며 후원을 받아오기도 해요. 그러면 저는 후원자분들 비위 맞춰주며 연신 감사하다고만 하죠. 개인일이라면 벌써 그만 뒀을 거에요.”
처음에는 신심으로 다닐 수 있지만 결코 신심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 포교. 경제적 후원도 없을뿐더러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요구되는 터라 포교사 갱신률은 40%에 지나지 않는게 현실이다. 새터민 포교역시 홍 포교사가 최고참이며 그 다음 오래된 이가 5년차에 접어든 안성 칠장사 주지 지강 스님이다.
그는 퇴소하고 나서 전화를 걸어오는 새터민들의 경조사도 꼬박 챙긴다. 그들입장에서는 가족처럼 가깝다 생각해서 전하는 소식이니 만큼 모른척 할 수가 없다. 때문에 그는 단 몇 푼이라도 챙기고 나서 그들을 만나러 간다. 자신의 움직임이 새터민들에게는 곧 불교가 움직이는 것으로 여겨지니 내키는대로 행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이토록 새터민 포교에 올인하게 된 연유는 따로 있지 않다. 포교사 시험도 주위 권유에 우연히 응시해 합격한 것이 다고 시설에 배속된 것도 집과 가깝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동기는 갖춰져 있지 않았다. 단지 현장에서 만난 새터민들의 아픔이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오로지 제대로 먹고 살기 위해 생사를 걸고 넘어왔죠. 7살짜리 아이는 얼마나 걸었는지 발톱이 다 빠져있을 정도고 세 살짜리 아이는 엄마랑 함께 오다 발각돼 북송된 엄마를 뒤로 하고 혼자 어른들 틈에 섞여 내려왔어요. 연로하신 어르신도 1살배기 아이를 들쳐업은 엄마도 제각각 사연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
“그 사람들의 아픔이 곧 제 아픔이더라구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단번에 그들의 고통이 전해졌어요. 새터민들의 몸은 성인일지 모르지만 문화적으로는 아이에 불과해요. 그들이 이곳에서 걸음마를 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사회구성원으로서, 종교인으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마거사가 따로 있지 않았다. 오로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생사를 넘어 가까스로 남한땅을 밟은 이들 앞에서 그녀 자신도 치열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10년간 억척스레 새터민들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이유다.
그녀의 전화번호는 10년전과 그대로 016으로 시작한다. 퇴소하고 난 새터민들이 오랜만에 연락했는데 결번이라는 메시지를 듣게 되면 실망할 것 같아서다. 덕분에 얼마 전에는 새터민 중 한명이 스님이 됐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새터민 모두가 자신에게는 동생이자 딸이며 엄마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는 홍성란 포교사. 일요일이면 법당 앞에 서서 새터민들을 한 명 한 명 정성스레 안아준다. 나갈 때도 마찬가지다. 가족, 고향과 떨어져 외롭고 정에 고픈 이들은 그녀 품에 안기기 위해 일렬로 서 있기 마련이다.
“제가 오히려 이곳에서 매번 부처님 가피를 입고 있는 것 같아요. 어렵게 살아온 사람들을 엄마 품속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해주는 게 정말 행복해요.”
고군분투해온 지난 시간. 홍 포교사는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는 “함께 가고자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참 고맙다”며 “그분들의 마음이 모여 눈길, 손길이 미치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불교 위상도 올리고 사람들을 다독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후원모집은 어렵다. 새터민들이 퇴소할 때 각 종교에서는 전자렌지와 밥솥, 이불을 나란히 부담하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온전히 지강 스님의 원력만으로 이불을 지원하고 있다. 한 달에 대략 5백만원씩 1년이면 6천만원에 달한다. 한 사찰에만 의존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그릇역시 종교별로 지원하고 있지만 불교는 얼마 전 후원처가 끊겼다. 지금은 홍성란 포교사가 자비로 부담하고 있다. 어떤 도움이든 절실한 것이 지금 새터민 포교의 현실.
그는 “탈북동포정착교육시설에서 종교활동을 허가한 이유도 지친 그들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정화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며 “새터민들을 감싸안는 것이 불교가 할 일”이라고 인터뷰를 마치는 순간까지 새터민 포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 2013년 12월 통일부장관상을 받은 후 새터민 포교를 같이 하고 있는 안성 칠장사 주지 지강 스님과 함께. 지강 스님(사진 오른쪽)은 같은 해 7월 통일부장관상을 수상했다.
   
▲ 2010년 청와대에서 통일부 유관기관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초청해 만찬을 진행했다. 이명박 前대통령 오른쪽에 있는 이가 홍성란 포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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