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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에 닮긴 삶(17) - 산중문답

허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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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에 닮긴 삶(17)

 

 

<山中問答>

  

    창가에 드러나는 가을 단풍이 절정이다. 티 없는 창공에 흰 구름이 한가롭고 노란

은행잎과 붉게 물든 단풍들이 사철 푸른 나무와 어울려 가을교향곡을 연주하듯 꿈결

같은 전경을 펼친다. 핏빛 단풍잎을 보노라면 숨이 멎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사계절

운데 유독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삭막한 겨울을 등지고 있기 때문일까. 문득 3년 전

이맘때의 일이 생각난다.

   가벼운 선식으로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산책삼아 방학동 방면으로 완만하게 뻗은

도봉산 오솔길로 쉬엄쉬엄 접어들었다. 방학능선으로 불리는 이 길은 도봉산 산행 길

가운데 걸어 다니기에 편한 길로 사색하면서 거닐기에 좋은 코스이다. 가을을 태우는

청명한 햇살에 어깨가 따사롭고 오솔길에 밟히는 마른 갈잎의 외마디소리가 청각을 자

극한다. 구르몽(Remy de Gourmont)의 낙엽 밟는 소리가 발끝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이브 몽땅의 고엽(枯葉)을 콧소리로 흥얼거리고 푸른 사철나무와 노랗게 혹은 붉게

물든 단풍이 조화로운 한 폭의 수채화 같가을 정취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전망대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방학 능선 상의 중간쯤에 위치한 전망대는 그해 여름에 설치한 철제구조물로 높이가

8~9m 정도 되는 두 개의 원형 구조물을 나란히 세워 꼭대기의 전망대에서 서로 연결

시켜 양쪽으로 왕래가 가능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전망대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도봉산의 만장봉과 북한산의 백운대, 수락산, 불암산을 비롯하여 멀리

남쪽의 관악산이 한눈에 드러나며 높은 산으로 에워싸인 서울의 도심이 선명하게 다가

온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의 능선은 가을단풍의 절정으로 붉은 기운이 산과 계곡에

가득 스며들어 산이 통째로 불타고 있는 느낌이다. 꼭대기의 전망대 난간에는 동서양의

유명한 시인들의 글귀를 프라스틱 판자에 몇 점 적어 부착해 놓고 있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북한산의 멋진 경관과 함께 아름다운 시심(詩心)을 선사하는 것 같았다.

여러 사람의 시(詩 )가운데 유독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시가 시선

을 끌었다.

 

     問余何事棲碧山 / 묻노니, 그대는 어이해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 / 웃을 뿐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 / 복사꽃 물에 떠서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 /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세상 아니라네.

 

   한동안 서서 자연경관과 함께 이백의 시를 음미하는데 주위의 산새소리가 분위기를 

돋군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잠간 서있는데 아래쪽 가까운 곳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살펴보니 눈앞에 귀엽게 생긴 고라니 새끼 한마리가 연녹색

나무 잎을 골라가며 따먹고 있었다. 사람들만 들끓는 도봉산자락에서 뜻밖의 동물을

보게 된 것이다.

   수년전에 방학능선 하단부에서 우연히 노루 같이 생긴 제법 큰 동물을 본 적이 있지

그 이후로 한 번도 산짐승을 보지 못했는데 모처럼 귀한 산 손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람이 지켜보는데도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고 제법 오랜 동안 나무 잎을 따먹더

서서히 숲속으로 사라졌다.

   선한 눈망울을 지닌 아기 고라니와 데이트하는 뜻밖의 행운을 만난 것이다. 연약하

겁 많은 짐승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이 동물을 학대하지 않는 서로 다른

명을 존중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는 보다 성숙한 인간의 삶을 그리면서 시월의

지막 날을 맞이하여 새삼 가을정서에 젖어본다.

 

 - 주간한국문학신문 기고 칼럼(2014.11.19)/청강 허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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