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에 닮긴 삶(19) - 미켈란젤로
허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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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에 닮긴 삶(19)
[미켈란젤로]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 북서부에 있는 바티칸시국(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은
가톨릭 교황이 다스리는 국가이다. 바티칸시티는 19세기 이탈리아가 근대 통일국가로
바뀌면서 교황청 직속의 교황령을 상실하게 되자 무솔리니와 협약[라테란(Laterano)
조약]을 통해 1929년 2월 교황령에 의해 독립국가가 되었다. 전체 인구는 1,000명이
안되지만 엄청난 문화유산과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전 세계 11억 1500만명
(2007년 교황청 연감)의 카톨릭신자들을 움직이는 교황이 기거하는 세계 최소의 도시
국가이다.
이 바티칸 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에는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천장에 그린
프레스코 벽화 '천지창조'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최후의 만찬'
등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작품들이 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3.6~1564.2.18)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인 '천지창조'를 그린 것은 37세 때였다. 천장화 ‘천지창조’는 미켈란젤
로가 1508년 5월 작업에 착수하여 4년6개 월 동안 하루도 쉬지않고 정열과 창작력을
총 동원하여 1512년 불후의 대작으로 완성한 것이다.
천정화 ‘천지창조’는 구약성서의 천지창조 일화를 주제로<천지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 이야기>의 3장 9화면을 구약 내용의 순서와는 반대로 그리기 시작, 그 화면
사이에 예언자나 천사(天使)나 역사(力士)를 배치하고, 복잡한 모습으로 묘사된 대리
석상 같은 인간군상을 부각한 그림이다.
미켈란젤로는 20m가 넘는 성당 천정까지 높은 제단 같을 것을 만들고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재료가 떨어지면 긴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회반
죽과 물감과 물을 가지고 끙끙대며 올라가 거의 누운자세로 고개를 뒤로 젖혀 얼굴을
천정쪽으로 향한 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4년 6개월 동안 계속 그 자세로 그림을 그
렸던 것이다. 현대 수학자들이 4년 6개월 동안 그 넓은 공간(길이 40.9m, 너비 13.4m)
에 그림을 완성시키려면 하루에 얼마나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계산을 해봤더니 장장
20시간이라고 한다. 하루에 4시간만 자고 그 불편한 자세로 20시간을 꼬박 그림만 그
린 셈이다.
그림은 1512년 완성되어 같은 해 만성절인 11월 1일 제막식과 함께 사람들에게 공개
되었다. 공개된 시스티나 교회 천장화는 실로 놀라웠다. 천장화를 본 사람들은 웅장하
고 아름다운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교황 율리우스 2세 역시 미켈란
젤로의 공을 치하했다. 창세기 인물들을 천장에 고스란히 담은 '천지창조'는 과감하고
역동적인 화법으로 창세기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를 통해 로마뿐 아니라 유럽을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는 '천지창조'로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천지창조'는 유럽을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걸작이다. 이 작품은 미켈
란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계략에 의해 탄생했다. 당시 로마 예술계의 거장
도나토 브라만테는 '피에타'상(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의 시체를 무릎
에 안고 슬퍼하는 광경을 표현한 작품)을 조각한 미켈란젤로를 견제했다.
어느 날, 율리우스 2세는 당시 벽화의 기법을 전혀 모르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둥근 천장에 그림을 그리라고 주문한다. 미케란젤로를 질투하던 브라만테가 교
황의 총애를 받는 미켈란젤로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교황에게 미켈란젤로를 추천한 것
이다.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이고, 이 작업으로 그의 명예가
실추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 미켈란젤로는 바티칸 궁전의
벽화를 그려 대성공을 거둔 라파엘로를 추천하면서 자신은 빠져 나오려고 했다. 미켈란
젤로만큼 외고집이었던 교황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아, 1508년 5월 10일 이 역사적
인 작업은 시작되었다.
이 주문은 미켈란젤로에게는 일종의 시험이자 시련이었다. 당시까지 조각 외에 천장
화는 단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었던 미켈란젤로, 그는 4년 동안 천장화를 그리며 심한
관절염과 시력장애에 시달렸다. 그러나 1512년, 미켈란젤로의 인고의 노력 끝에 '천지
창조'가 완성됐고, 도나토 브라만테의 음흉한 계략은 실패한다.
이 천장화와 더불어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시스티나 성당에는 벽화 <최후의 심판>
이 있다. 당시 교황인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성당의 안쪽 벽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아 <천지창조>에 이은 <최후의 심판> 작업이 시작되었고, 고생 끝에 6년 후인 1541
년에 완성되었다. 그 후 500여년 동안에 이 그림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덧칠로 색채와
형태가 변질되었으나 최근 첨단기법에 의한 복원작업으로 본래의 색채와 형태가 되살
아났으며 그림의 훼손을 막고자 입장객을 연간 600만명 수준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한
다.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가 복원 된 후, 로마의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이 작품을 공개한 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몸으로 이루어진 신학의 거룩한
성소"라고 말했다. 세월 앞에 인간의 목숨은 부질없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이 증명
된 셈이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의 피렌체 근교 카프레제에서 출생, 어려서
부터 그림에 뛰어나,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13세 때에 당시 피렌체의 뛰어난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Ghirlandajo)에게 입문하여 공방(工房) 도제(徒弟)가 되었고,
14세때부터 피렌체 메디치가의 조각학교에 입학,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베르
트르드 디 조반니를 통하여 도나텔로 작풍을 배웠다. 또 고대 조각도 연구하고, '계단
의 성모', '라피타이족의 싸움'을 제작했다. 1496년 로마로 가서 1499년 성 베드로 대
성당의 '피에타'를 완성했다.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다비드'를 제작하였다. 이 거상
은 시청 문 앞에 놓여 피렌체 자치 도시를 지키는 상징으로 간직되었다(아카데미아
미술관). 율리우스 2세로부터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 '창세기'(1508~12) 제작을 명
받았으며, 피렌체에서는 산 로렌초 성당의 메디치가 묘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
성당 내의 '피에타' ,로마에서는 '모세'(성 베드로 인 빈콜리 성당)와 '노예'(루브르 박
물관), 다시 만년에 '론다니니의 피에타'(밀라노, 스포르차 미술관) 등을 제작하였다.
화가로서 시스티나 예배당 정면벽화 '최후의 심판'(1536~41), 바티칸 궁전 파올리
나 예배당의 벽화 '바올의 개종'과 '베드로의 순교'(1542~49)를 완성했다. 건축가로
서는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 부속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설계(1524년 이후),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의 정비 계획(1537년 이후), 성베드로 대성당 건조(1546년 이후) 등
의 역사(役事)에 종사하였다. 미켈란젤로의 양식은 조각, 회화, 건축 각 분야에 걸쳐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완성에 기여하는 동시에 후세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시스티나 성당(1473~1481건립)은 교황 식스투스 4세에 의해 만들어진 성당으로
바티칸 궁전 내부에 건축되었다. 라파엘로, 산드로 보티첼리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이 참여하여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그 가운데서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오 2
세의 후원을 받으면서 1508년에서부터 1512년 사이에 성당의 천장에 12,000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 불멸의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16세기 작품이다. 이제 500년
이나 지난 천장화를 복원해 낸 현대인들 역시 그 작업을 하면서 미켈란젤로라는 한 인
간에 대한 경외감을 품었다. 식스투스 4세의 치세 이래,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이 종교
적·직무상의 활동을 하는 장소로서의 소임을 해 왔다. 오늘날에 이곳은 전 세계의 추기
경들이 모두 모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종교적 의식인 콘클라베(Conclave :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시스템)를 여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가, 건축가, 화가로써 89세의 나이까지 살았다. 그는 삶을 마치기
3일 전까지도 손에 망치와 정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만년에는 병상에서 일어나 작업을
하기 위해 비를 맞으며 성 베드로 성당으로 달려가다 하인의 등에 업혀 오기를 여러 차
례 하기도 했다. 항상 병치레를 하면서 '식사할 시간도 없이' 일에 몰두 해 작업을 멈추
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그에게 휴식을 권하자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
다고 한다. “죽으면 영원히 쉴 텐데 뭘 했다고 쉬어”.
<미켈란젤로의 시>
하루라도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에도 평안이 없습니다.
당신을 만날 때
당신은 마치 굶주린 자의
맛있는 음식과도 같습니다.
당신이 웃음 지을 때, 길에서 인사를 할 때
나는 용광로처럼 불타오릅니다.
당신이 말을 걸어주면 나는 얼굴을 붉히지만
모든 괴로움은 일시에 가라앉지요.
- 2015.01.24 / 청강 허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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