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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파스출처 -9산선문

서용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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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산선문은 9~10세기에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에 따라 주관적 사유를 강조한 선종(禪宗)을 산골짜기에서 퍼뜨리면서 당대의 사상계를 주도한 아홉 갈래의 대표적 승려집단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아(直指人心),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에 눈떠(見性成佛), 대립과 부정을 상징하는 문자를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로 지향하여(不立文字), 번쇄한 교리를 일삼은 교종(敎宗) 종파들이 소홀히 다루어 온 부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본래 의미를 따로 전한다(敎外別傳)는 4구의 구절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정리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4구표방(四句標榜)인데, 4구가 처음부터 함께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대체로 시간면에서 따져보아 교외별전을 제외한 3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종에 관한 논의에 그대로 다루어서 무방하다고 하네요..

 

 



9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 9산선문이 집중적으로 세워지자, 교종에 대비되는 선종의 정체에 질문이 시작됩니다. 선종의 극성과 함께 대두한 선교(禪敎)의 우열에 관한 판단이 그것인데요.. 당시 선사(禪師)들은 선교간 상호위치 정립에서 대립의 관계보다 양립의 관계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예컨대 9산선문으로 정착해 가던 9세기 후반의 선종승려들이 교종과 일정한 동반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그렇거니와, 선종이 정착되기 이전의 9세기 전반에는 화엄종의 대표적 3대사찰이 교선일치의 성향에 입각하여 선종을 수용한 것이 그 증거라고 하네요..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논의할 성격의 것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선종 입론의 근거가 그때까지는 아직 교종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이 시기 선승(禪僧)들을 대표하는 낭혜무염(郎慧無染)이 선교의 시시비비를 내치는 구절도 그렇거니와, 다른 선사들에게서도 보이는 것처럼, 선을 교의 상징들과 동격으로 병렬하면서 그것조차 뛰어넘고자 한 불립문자적 세계관이 바로 그 점을 웅변하고 있는데요..

 

이 두 측면의 결합, 하나는 선종의 입론이 불가피하게 교종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한계성과, 하나는 교종과 조화를 이루되 그것을 포함하여 뛰어넘는 자기초월적 관점에 기초했다는 세계관이, 신라 말 고려 초에 선사들이 선교의 상호위치 정립이라는 이념적 과제를 선교대립보다는 선교양립적 방법으로 해결하게끔 한 것이죠.. 가령 교종부정 또는 교종대립의 한 표방으로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나타나는 신라 선종 조사(祖師)들과의 관련내용은 1290년대 천책(天])이 정리한 선종우위의 특색을 반영한 설화 모음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하네요..

 

960년 무렵 혜거(慧炬)에서 추상적으로 나타나서, 바로 뒷 세대인 1000년 무렵 영준이 구체화해 나간 소극적 선 우위의 사유자세는 뒤 시대에 정립된 교외별전이라는 적극적 선 우위의 사고체계를 이끌어냈다고 합니다. 신라 말 고려 초의 법맥승계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사문 안에서의 자유로운 교류, 다른 가르침이나 다른 스승의 허용, 자칫 스승이나 시간 위주의 보수적으로 경색되기 쉬운 사제간의 관계설정이, 배우는 이 자신에게 달려 있을 만큼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죠..

 

그리고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말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인 보요선사(普耀禪師), '조당집(祖堂集)'에서 높이 평가한 오관산 서운사 순지화상, 최치원이 높이 평가한 쌍계사 진감혜명은, 그들의 후예가 번성하지 못함으로써 9산선문의 계보에서 제외된 것이라고 추측된다고 합니다. 이 점에서는 활동한 시기와 제자들에 의한 활약, 이 두 가지가 9산선문의 성립요건으로 작용했다고 정리할 수 있는데요.. 즉 왕건에 의한 후삼국통일 이전 시기에 국사와 왕사의 지위에 오르거나 이에 비견될 예우를 받은 이들이 산문을 열고, 그 후예들 가운데 뛰어난 승려들이 계속하여 배출된 곳은 역시 9산선문 밖에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실상사>


 

절과 산문을 동일한 대상물로 파악하지 않고, 한 절이 산문으로 불린 이래의 산문이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일정한 계통의 흐름이 계속하여 이어진 곳을 말한다는 원칙에 합의한다면, 신라 말 고려 초의 불교계를 주도한 선승들 대부분은 수미산문을 제외한 나머지 9산선문의 계보 안에서 활동한 존재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조심스럽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당대의 선종을 총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대표한 것은 9산선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죠..

 

좀더 비약하여 말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고려시대의 선종과 신라 말 고려 초의 9산선문이란 용어의 차이는 의식하건 않건 간에, 지역분포, 국가와의 관계, 선 수행의 내용, 각 산문과의 관계 등에서, 두 시대 간의 선종에 차별성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용어로 쓰여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9산선문의 성립은 신라 하대에 이르러 이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장한 지방민의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며, 비록 특정한 신분집단이나 개인의 지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세력 일변도의 지지 속에서 선종의 기반이 세워지지 않았음이 주목된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농민전쟁기를 고비로 호족과 선사들의 밀착관계가 형성되고, 후삼국 쟁패가 치열한 지역에서는 세력권의 변화에 따라, 연고지의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농민전쟁 발발 이전에 혁명적으로까지 보이던 선종이, 사실상 양심적인 개인의 지성만으로 만족하는 진보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였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죠..

 

이는 선종의 관념성이 지닌 현실인식의 한계가 농민전쟁 이후의 농민군에게 물리적 압박을 받으면서 점차 지배계급에게로 기울 수밖에 없던 점에서 잘 나타난다고 하는데요.. 결국, 무논리의 주관적 사유세계를 강조한 선종은 다소 진보적인 사회성을 띠기는 했지만, 이전의 화엄종의 대안으로 등장한 신라 말 고려 초의 주요한 이념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나말려초 9산선문의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실제를 통해 각 산문의 정확한 계보입니다..

 

 


 

9산선문과 선종의 사회적 기반

9산 선문 선사들은 대체적으로 왕실과 거리를 둔 긴장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산문이 일단 정착되거나 중인들의 추앙을 받은 뒤에는 왕실의 초청이 있었지만, 선사들은 초청을 대부분 거부했죠.. 이러한 왕실의 산문 접근은 맹 집요하다고 할 정도였는데, 이는 왕실의 대산문정책이 거의 불가항력이었음을 반증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다양한 신분계층이 산문을 지지하는 것을 의식한 행위로 해석되는 것이죠..

더욱 주목할 것은 거대규모의 사원 조성이 지역사회 신도들의 자발적이고 공개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진 점인데요.. 왕실은 오히려 사원이 조성되고 난 후에 이를 인정하고 있다. 이는 신라 하대, 지방사회의 역동성과 민중들의 힘의 성장을 반영한다고 할 수밖에 없죠.. 이것은 민중 속에서 사상, 경제, 기술, 산업, 예술이 고루 성장했던 것을 뜻하며, 중앙권력이 하대의 정쟁(政爭)을 거치면서 사실상 경주 일대를 벗어나지 못한 힘의 약세를 노출시킨 것이기도 하다고 하네요..

이상의 사실에서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듯이,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장한 지방민들의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9산선문의 성립이 가능했던 것이며, 비록 특정한 신분집단이나 개인적인 지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민 이외의 일정한 세력 일변도의 지지 속에서 그 기반을 세웠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나말려초의 격동하는 사회변화에 따라 산문의 사회적 관계도 변화를 맞게 되었는데요.. 이 시기(886~ 900년)에는 신라 멸망의 주요한 계기가 된 농민봉기가 대규모로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변화에 따라 농민전쟁 이전에는 다양한 민의 지지위에 다양한 신분집단과 균형잡힌 관계를 유지했던 선사들이 886년 이후에는 농민군의 약탈과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호족과 선사들의 밀착관계가 형성되었으며, 후삼국쟁패가 치열한 지역에서는 세력권의 변화에 따라 연고지의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즉, 선종의 관념성이 지닌 현실인식의 한계가 농민전쟁 이후 농민군에게 물리적 압박을 받으면서 점차 지배계급에 의탁하는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이죠..

대표적으로 호족과 밀착된 산문으로는 봉림산문과 사굴산문이 있다고 합니다. 봉림산문의 심희는 김해의 가야계 김씨세력인 김율희(金律熙)와 김인광(金仁匡) 부자의 후원으로 봉림사를 열고 신라 경명왕의 초청에 응하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후삼국 세력과 각기 연결되는, 후삼국 경영체제의 일환을 짐작할 수 있죠.. 실제 심희 제자의 분포 모습도 친신라지역에 펼쳐져 있음이 눈에 띈다고 합니다.

한편 사굴산문의 행적은 김해 지방의 가야계 김씨 세력인 소충자(蘇忠子)와 소율희(蘇律熙) 형제의 후원을 받고, 신덕왕의 요청으로 남산 실제사에 머문다고 하는데요.. 또한 개청은 알찬(閼飡) 민규(閔規)와 왕순식(王順式)의 후원을 받고, 뒤이어 왕건과 인연을 맺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9산선문은 대부분 그들을 후원하는 유력한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선종은 진골 중심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에 반발하여 일어난 호족들에게 독립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였던 것이죠..

교종은 경전(經典)이라는 기성의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에서의 골품제도가 가지는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고 하는데요.. 거기에 반해 선종은 경전이라는 기성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호족들이 골품제도라는 기존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고 자립할 수 있다는 현실적 근거를 제공하였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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